우리 나라 전경련 건물 외벽에는 대통령 취임과 함께 ‘2만달러 시대’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업가들의 구호는 집권자의 경제관마저 바꾸고야 말았다.
자칭이든 타칭이든 ‘원로’라 일컬어지는 분들은 나라를 ‘위기’라고 단정하면서 정작 위기의 원인 제공자들에 대한 비판은 생략한 채 이미 충분한데도 새로운 전국 정당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거리에는 장마와 무더위로 찡그린 얼굴의 사람들이 걷고 있고 직장을 잡지 못한 젊은이들이 늘고 있으며, 신용불량자는 자그마치 300만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자주 들린다. 그런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2만달러 시대를 위한 국가개조론’을 새로운 국정 목표로 제시하려는 낌새다. 대선 즈음에 ‘노무현 진영’에서 내건 슬로건은 상대 후보가 채택한 무한성장론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과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등을 열쇠말로 한 ‘따뜻한 대한민국’이었다.
경제성장은 우리를 풍요롭게 했는가
히말라야에는 티벳불교의 경전을 인쇄한 얇은 천을 매달아 불경 말씀이 바람을 타고 말갈기처럼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기대하는 ‘룽다’라는 깃발이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전경련 건물 외벽에는 대통령 취임과 함께 ‘2만달러 시대’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업가들의 구호는 집권자의 경제관마저 바꾸고야 말았다. 대선 때의 가슴 설레게 했던 약속을 거둬들임으로써 노무현 정부는 토대가 약한 경제철학뿐 아니라 국정철학마저 의심받게 되었다. 그래서 한 논객은 그를 ‘얼치기 개혁주의자’라고 근심 어린 충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득 구호주의의 바탕인 경제성장론은 이른바 “떡판(파이)이 커져야 나눠 먹을 것도 많다”는 파이론(論)으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파이론의 역사는 길다. 박정희 정부가 오랫동안 리드했던 압축개발 시절부터 경제성장 만능론은 지상과제였다. 다른 어떤 국가가치도 성장론에 압도당했다. 하지만 “허리띠 졸라매고 우선 경제발전을 수행하자, 분배는 그 다음이다”라고 말했던 지도자는 분배하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죽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제성장은 우리를 과연 풍요롭게 했을까 대망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성취한 이 나라의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속한다지만, 2002년 현재 1인당 국민총소득은 9천달러에 조금 못 미쳐 50위 바깥이다. 국민총소득과 행복지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건만, 이 나라 민초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편의상의 소득등급과 국가경제 규모의 턱없는 불일치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 사회의 격심한 빈부격차와 그 격차가 철벽처럼 고착화되어 점점 벌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경기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단단한 주류 상식으로 자리잡아 마치 봄에 꽃 피고 가을에 낙엽 지는 일처럼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진보’에 속한 사람이나 ‘보수’에 속한 사람이나 똑같이 맹신하고 있는 가치다. ‘발전’이라는 말은 미국의 전 대통령 트루먼이 1949년 취임연설문에서 타동사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자동사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어떤 나라에도 ‘발전‘이 국가정책으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세계의 나라들을 ‘발전시키겠다’고 선언한 이래,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발전’을 국가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착취당하는 나라에서조차 ‘발전’은 지상과제였던 것이다. 한국은 지구상의 어떤 나라보다 더 발전 이데올로기를 적극 실현한 모범국(?)이었다. 그렇지만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취의 대가로 더 깊어진 불평등과 회복 불가능한 파괴라는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 끈질긴 발전 이데올로기 파이론은 커진 경제규모만큼 지구의 자원환경이 커지지 않는다는 점과, 큰 조각은 작은 조각을 가로채야만 가능하다는 점만으로도 그 허구성이 드러난다. 끝없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어딘가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삼림이 남아 있는 한, 그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는 신념에 불타고 만다. 발전 이데올로기는 아직 매립되지 않은 갯벌이나 허물지 못한 산이 남아 있는 한 발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는 반생명적 이데올로기다. 소득구호를 턱없이 높여 잡는 것이 경제위기의 해법일 수는 없다. 불경 말씀이 펄럭이는 히말라야보다 ‘2만달러론’이 펄럭이는 우리 사회가 더 풍요롭고 건강한가. ‘따뜻한 대한민국’은 정말 물 건너갔는가. 최성각 | 소설가·풀꽃평화연구소장

최성각/ 소설가·풀꽃평화연구소장
소득 구호주의의 바탕인 경제성장론은 이른바 “떡판(파이)이 커져야 나눠 먹을 것도 많다”는 파이론(論)으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파이론의 역사는 길다. 박정희 정부가 오랫동안 리드했던 압축개발 시절부터 경제성장 만능론은 지상과제였다. 다른 어떤 국가가치도 성장론에 압도당했다. 하지만 “허리띠 졸라매고 우선 경제발전을 수행하자, 분배는 그 다음이다”라고 말했던 지도자는 분배하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죽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제성장은 우리를 과연 풍요롭게 했을까 대망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성취한 이 나라의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속한다지만, 2002년 현재 1인당 국민총소득은 9천달러에 조금 못 미쳐 50위 바깥이다. 국민총소득과 행복지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건만, 이 나라 민초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편의상의 소득등급과 국가경제 규모의 턱없는 불일치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 사회의 격심한 빈부격차와 그 격차가 철벽처럼 고착화되어 점점 벌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경기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단단한 주류 상식으로 자리잡아 마치 봄에 꽃 피고 가을에 낙엽 지는 일처럼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진보’에 속한 사람이나 ‘보수’에 속한 사람이나 똑같이 맹신하고 있는 가치다. ‘발전’이라는 말은 미국의 전 대통령 트루먼이 1949년 취임연설문에서 타동사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자동사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어떤 나라에도 ‘발전‘이 국가정책으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세계의 나라들을 ‘발전시키겠다’고 선언한 이래,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발전’을 국가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착취당하는 나라에서조차 ‘발전’은 지상과제였던 것이다. 한국은 지구상의 어떤 나라보다 더 발전 이데올로기를 적극 실현한 모범국(?)이었다. 그렇지만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취의 대가로 더 깊어진 불평등과 회복 불가능한 파괴라는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 끈질긴 발전 이데올로기 파이론은 커진 경제규모만큼 지구의 자원환경이 커지지 않는다는 점과, 큰 조각은 작은 조각을 가로채야만 가능하다는 점만으로도 그 허구성이 드러난다. 끝없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어딘가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삼림이 남아 있는 한, 그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는 신념에 불타고 만다. 발전 이데올로기는 아직 매립되지 않은 갯벌이나 허물지 못한 산이 남아 있는 한 발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는 반생명적 이데올로기다. 소득구호를 턱없이 높여 잡는 것이 경제위기의 해법일 수는 없다. 불경 말씀이 펄럭이는 히말라야보다 ‘2만달러론’이 펄럭이는 우리 사회가 더 풍요롭고 건강한가. ‘따뜻한 대한민국’은 정말 물 건너갔는가. 최성각 | 소설가·풀꽃평화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