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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재미없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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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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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거리 중에 으뜸은 싸움구경이다. 길가다 두 사람이 멱살을 잡거나 얼굴을 맞대고 소리를 질러대면 그 재미를 놓칠세라 금세 구경꾼들이 몰려든다. 왜 싸우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힘겨루기 결과는 어떨지가 흥미롭다. 말리는 사람이 등장하면 재미는 더해진다. 요즘처럼 무덥고 짜증나는 밤이면 아파트단지나 동네 어귀에서 고함소리만 들려도 혹시나 하고 창문을 열어보게 된다. 괜한 ‘기대감’에 집 밖을 서성대는 것은 좀 병적인가.

사진/ 한겨레 윤운식 기자
그러나 싸움이 항상 재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동일 인물이 이웃과 사사건건 시비를 벌이거나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싸움판은 흥미가 반감돼 구경꾼이 꼬이질 않는다. 멱살 정도가 아니라 흉기가 등장하거나 패거리 지어 난장판으로 변질되면 서둘러 발길을 돌려야 한다. 재수없으면 ‘유탄’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과 ‘국민의 알 권리’ 사이에서 국익을 선택했다. 대북송금 특별검사의 수사기한 연장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한나라당이 즉각 ‘처절한 투쟁’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여야 정쟁이 또 시작된 것이다.

과연 구경꾼들이 얼마나 모여들지 알 수 없으나 예전 같지는 않을 것 같다. ‘도 아니면 모’ 식의 정쟁이 너무 잦은 탓이다. 대북송금의 논쟁거리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재미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사실 이번 특검을 통해 남는 장사를 한 쪽은 한나라당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국민의 정부 실세들을 줄줄이 손봤으며, 민주당 갈등을 심화시켜 무력화시킨 것 등등.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특검 초기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북송금 과정을 파헤친들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난 대선에서 우리 당을 지지한 사람들의 한(恨)을 풀어주기 위해 단지 그들을 특검에 불러내려는 것”이라고. 실세 여럿을 사법 처리까지 했으니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정쟁이 격화되면 장외투쟁이라는 ‘흉기’가 등장할지 모른다. 한나라당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편가르기를 시도하며 ‘패싸움’을 벌일 수도 있다. 특검 연장 거부에 반발해 법안 심의를 거부하고 국무위원 해임건의안 처리를 강행하겠다는 으름장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총선을 겨냥해 마냥 억지를 부리지 않을까도 걱정이다.

싸움이 극적인 재미를 더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라는 반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리는 구경꾼들을 붙잡아두려면 재미를 줄 수 있는 일로 정쟁을 하거나, 재미없는 정쟁이면 서둘러 반전을 꾀해야 한다. 싸움을 건 한나라당의 몫이다. 고함소리만 들려도 창문을 열게 하는 한국 정치의 재미를 즐기고 싶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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