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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소형차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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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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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편의 중형차를 몰고 나간 날에는 달라지는 대우에 당황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나는 그대로건만 단지 타고 있는 차가 바뀜으로 해서 나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성질나는데 확 차를 바꿔버려?'

이영미 | 교사·〈작은 친절〉 지은이
며칠 전 퇴근길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차가 막혀 급한 마음에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차종도 알 수 없는 아주 크고 멋진 차가 어정쩡하게 주차되어 있던 탓에 앞차들이 쩔쩔매며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엘란트라가 빠져나가고 아반떼가 빠져나간 후 내 차가 그 차 옆을 거의 다 빠져나왔다 싶은 순간 갑자기 내 차를 세게 두드리는 소리와 아주 거친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운전석쪽의 창문을 여니 갑자기 손 하나가 차안으로 쑥 들어왔다.

벗은 거지는 굶는다


"야, 너 지금 무슨 짓이야?"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짜고짜로 내뱉은 한 마디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더욱 흥분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 미쳤어? 이 차 긁으면 어쩔려고 이래?"

"아저씨, 부딪힌 것도 아니고 제가 보니까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 왜 그러세요?"

"저쪽으로 붙여 저쪽으로. 이 차 긁으면 너 어쩔거야?"

"이쪽에는 여유가 더 없어요. 그리고 제 차는 워낙 소형이라…."

"이게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너 정말 간도 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거의 다 빠져나왔던 터라 차를 완전히 뺐다. 내가 그러는 사이 남자는 계속 내 차를 두드리며 욕설을 해대는 것이었다. 상대하지 말자며 어금니를 깨물고 그냥 오려는데 그 남자 차안으로 머리를 쑥 디밀더니 이러는 게 아닌가.

"긁힐 뻔했잖아.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어?"

급기야는 이런 말까지 하며 꼭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사과하라면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말이 많아. 마티즈 타고 다니는 주제에. 저 차가 얼마짜린 줄이나 알고 그래? 수리비가 니 차 값보다 더 나올 거다."

자기가 주차를 제대로 하지 않아 골목이 좁아졌고 그 길을 빠져나가느라 신경을 곤두세운 나에게 남자는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급 외제차를 긁을 뻔했다는 이유로 내가 치른 곤욕이 너무 서글펐다. 어떤 차를 타는가가 중요하지 그 차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난다.

나는 돈이 없어서 마티즈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서럽고 분했다. 내가 단지 타고 다니는 차로 인해 그 사람에게 그런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에. 그 사람의 평가가 그리 중요한 것이겠는가 하며 웃어넘기려 애를 썼지만 핸들 잡은 손이 달달 떨렸다.

옛 속담에 ‘입은 거지는 빌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굶는다’는 말이 있다. 15년 전 결혼해 처음으로 마련했던 중고 '포니'를 타고 동창모임에 갔던 남편이 주차 문제로 호텔 직원과 싸우고는 동창회에 참석도 하지 않은 채 돌아왔던 일이 있다. 그 후로 차는 큰 것을 타야 한다며 남편은 중형차를 고집한다. 그들은 지금의 남편을 그렇게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본질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건만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명품에 대한 집착

내가 나의 마티즈가 아니라 남편의 중형차를 몰고 나간 날에는 달라지는 대우들에 당황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나는 분명 그대로건만 단지 타고 있는 차가 바뀜으로 해서 나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성질나는데 확 차를 바꿔버려?'

요즘 '명품'이라는 단어를 종종 접한다. 그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함께 '고가품'이 곧 '명품'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지 오래인 우리의 현실. 그리고 그런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간단하고 쉽게 해버리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자꾸만 겉치레에 치중하는 것이 아닐까?

'고가품'인 명품을 들고 다니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 오늘 내가 느낀 기분을 경험해 본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한다.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으로, 입고 있는 옷으로 인해 달라지는 대우를 경험한 사람들이 '입은 거지'가 되기 위해 명품을, 안되면 모조품이라도 들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마티즈 타는 주제에'라는 말을 듣고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데 수위 아저씨 이제 퇴근하느냐며 한 마디 덧붙이는 말씀이 이랬다. "선생님, 차 바꾸셔야겠어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아요. 큰 차로 바꾸세요."

내 몸집에 비해 차가 적어 보여 그러는 줄 알지만 울컥하는 마음에 굳어진 얼굴 근육을 애써 펴며 한마디했다. "아저씨, 저 이래도 마티즈에 쏙 들어가요."

이영미 | 교사·〈작은 친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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