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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촛불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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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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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비가 오락가락해 은근히 걱정을 했지. 가랑비만 내려도 촛불은 불을 밝히기 어려우니까. 하늘도 너희의 명복을 비는지 13일에는 비를 멈추어주더군. 너희는 그날 밤 흰색 저고리에 적색과 청색 치마를 입은 인형의 모습으로 되살아나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서 있었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조형물이 너희 어깨와 손등에 앉아 있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너희 부모님들도 오셨더군. 단상에 올라 “효순이, 미선이를 위한 촛불을 지켜준 것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지. 다 키운 딸들을 먼 세상으로 보낸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 꽤나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이었어. 모두 촛불을 높이 들어 부모님께 위로와 격려의 함성을 보내드렸지.

사진/ 박승화 기자
너희가 떠난 뒤의 이곳 세상소식을 전해줄까. 너희도 궁금했을 월드컵대회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올랐고, 부산 아시안게임에는 북한 응원단이 다녀갔지. 노무현 대통령이 새로 뽑혔고, 최근에는 노 대통령이 너희를 죽음에 이르게 한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고, 북한 핵에 맞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닌지 모두 걱정하고 있지. ‘사스’라는 낯선 괴질이 아시아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단다.

생각보다는 꽤 많은 일들이 꼬리를 물었구나. 결코 짧지 않은 1년이었어. 그런데 너희가 떠나며 우리에게 남겨놓은 일들은 달라진 게 없으니 안타깝고 미안할 뿐이다. 소파 개정과 미군 처벌, 부시 대통령 공식 사과 등등. 조금 달라진 게 있어 위안을 삼는다. 주한 미 대사가 1주기를 맞아 유감을 표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너희 부모님들도 만나 사과의 뜻을 전한 모양이더군. 주한미군도 병사들의 외출을 금지한 채 추모예배도 보고 훈련도 중단시켰다더라. 외출금지야 충돌을 우려한 병사 보호용이겠지만 말이야. 내년에는 더욱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들에게 기대해보자.

시청 앞 추모행사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더군. 미 대사관으로 향하는 촛불행진을 전경버스가 막아서자 ‘열받은’ 사람들이 버스를 떠밀어 쓰러뜨리려고 했지. 행사 주최쪽은 “경찰이 다칠 수 있고 효순이, 미선이가 원치 않는 일이니 밀지 말라”는 방송을 하더군. 사람들이 곧 버스를 멀리했고 아무런 사고도 없었단다. 너희 때문에 시작된 평화적 촛불시위가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낸 것이지.

너희의 추모일 이틀 뒤는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이었다. 14일에는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 철도가 한반도를 연결했지. 해마다 6월이 오면 우리 국민은 이제 13일에는 미국을, 15일에는 통일을 생각하게 될 거야. 너희의 죽음과 남북 정상의 만남은 남북 철도처럼 결코 뗄 수 없는 사건으로 영원히 기억되겠지. 그렇게 항상 우리 곁에 있으렴.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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