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범국민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을 제안하다
“세계적 전쟁기념관을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서울 용산에 자리잡은 3만5천평 부지의 전쟁기념관은 가히 세계적 규모다. 인터넷에서 전쟁기념관 홈페이지를 열면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1600평의 기획전시실과 테마파크 형식의 공원을 갖추고 있다는 홍보자막부터 떠오른다. 그래서 이곳은 언제부터인가 서울 시민들이 즐겨찾는 휴일 나들이 코스가 됐다. 주로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은 전쟁에 사용돼온 각종 무기들과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공산침략군에 맞서 싸웠다는’ 우리 군의 다양한 면모를 감상한다.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6·25전쟁실·해외파병실·대형장비실 등 8개 방으로 된 전시장은, 하루에 소화하기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대한민국 국민은 정말로 이 전쟁기념관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뿌리
전쟁기념관에 대비되는 대안적 운동으로,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국제민주연대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공동대표 이해동 강정구), 성공회대 인권평화센터(소장 한홍구)는 지난 6월15일 50여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회대 새천년관에서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을 위한 워크샵’을 열었다.
평화박물관 운동은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한겨레21>과 함께 해온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2000년 6월부터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쾌척한 7천만여원을 종자돈 삼아 베트남전 전쟁피해 지역에 평화역사관 건립 계획을 세워온 바 있다. 그러나 이날의 워크숍은 그동안의 평화역사관 건립운동을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벌여온 베트남 평화운동을 수렴하지만, 그 폭이 대거 확장된 범국민 평화운동 차원의 평화박물관 운동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첫 발제자로 나선 이대훈(평화학 연구자·참여연대 협동처장)씨는 “평화박물관은 기존 ‘전쟁박물관’ 관행에 대한 대안으로서 반전평화의 가치를 분명히 하면서 사회적 기억운동을 본격 개척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박물관에 대해 “국가의 후원 속에 제도교육과 결합해 전쟁을 찬양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은근히 홍보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질서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할 평화박물관은 ‘분쟁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주는 사회적 공간’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평화박물관, 미국 시카고와 일본 리쓰메이칸대학의 평화박물관을 소개한 이대훈씨는 평화박물관 운동이 ‘시설물 운동’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설과 전시물로 출발하되 ‘생활 속으로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자. 거창한 공간을 짓는 것도 좋지만 학교나 상점의 한 귀퉁이나 통로를 정해 ‘평화의 계단’, ‘이라크 어린이를 생각하는 공간’ 따위를 방방곡곡 만든다면, 평화박물관의 사회적 효과가 생활 속에서 잔잔하게 확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박제된 물건들이 전시되는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을 강조했다. 정기용(건축가·기용건축 대표)씨의 두 번째 발제는 전쟁과 평화와 관련된 100여장의 슬라이드쇼로 시작됐다. ‘건축의 철학자’답게, 그가 펼친 사진과 이야기는 참가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인가? 그럼 전쟁 없는 지금의 한반도는 평화로운가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누군가 계속 물고늘어질 것인데 평화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평화의 반대말은 비평화이며, 전쟁의 반대말은 비전쟁이 아닌가?” 그는 프랑스 파리의 유태인 순교자 기념관과 스웨덴 스톡홀롬의 우들랜드 묘지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관람객들의 감각을 깨우는 박물관 건축의 미학을 설명하기도 했다.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박물관을”
“평화박물관 운동은 세계화의 망령에 대항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일”이라고 조금은 거창하게 규정한 그는 “평화박물관 안에는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가능케 할 매개물들이 수집되고 저장되고 분류되어 전시될 수 있으며,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곳에서 보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평화박물관을 사이버 공간에 먼저 세울 것을 제안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앞서 이대훈씨가 제기한 ‘생활 속의 박물관’과 일맥상통한다. 정기용씨의 결론은 인상적이었다. “이에는 이로, 전쟁은 전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 평화라는 이름의 세균전을 의미한다. 소리 없이, 소문도 없이 쫙 퍼져서 미국보다 더 강력한 세균으로!”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한홍구 교수(성공회대·한국현대사)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에서부터 평화박물관 건립 운동까지의 짧은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지난 1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인사들이 베트남 푸옌성의 ‘한-베 평화공원’(Han-Viet Peace Park) 준공식에 참석한 뒤 평화역사관 건립안이 네 가지로 정리됐다고 소개했다. 그것은 1)원래 계획대로 베트남 ‘한-베 평화공원’ 옆에 평화역사기념관을 건립하는 방안 2)베트남 전쟁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문화시설 3)베트남 현지 피해자들이 부지를 마련하는 등 준비가 된 지역에 위령관을 짓는 방안 4)한국에 평화역사기념관을 짓는 방안이다. 지난 3월25일 회의에선 “네 가지 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다 해야 하는 문제”라는 내부의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 교수는 “그러나 이걸 꼭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떠맡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있었고, 각계각층을 조직해 의미 있는 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키자는 논의가 공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인권과 평화를 염원하는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및 일반 시민들과의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 21세기 한국 평화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이다. 한홍구 교수 역시 앞서의 발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베트남에 짓는 박물관 모두 기존의 전통적 형태를 되도록 지양하고 학교와 교회, 도서관 시민단체 등 기존 건물을 활용하는 네트워크와 콘텐츠 중심의 방식을 강조했다.
21세기 평화운동의 새로운 모델
발제 뒤 토론시간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됐다.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나눔의 집’을 잘 활용하자. 고엽제·원폭 피해자들과도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자.”(평화운동가 김승국) “어린 학생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평화교육을 체험하게 하는 공간으로 테마를 잡아갔으면 좋겠다.”(역사교사 한석주) “평화박물관 운동이 진행되면 노근리와 관련된 각종 영상자료와 문서자료를 기꺼이 제공하겠다.”(노근리인권평화연대 정구도) “베트남 도시학생들은 전쟁피해 실상들을 잘 모른다. 호치민 같은 큰 도시에도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나와 우리 김정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평화이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베트남전 진실위 윤석연)
이날 워크숍은 비가 오는 일요일임에도 인권·시민단체 관계자들뿐 아니라 학계·출판계·의학계·영화계·법조계·노동계·교육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참석해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물론 의견은 폭포수처럼 쏟아졌지만 확정된 사항은 없었다. 하지만 평화박물관에 접근하는 발상의 전환이 큰 공감을 얻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더불어, 전쟁기념관만 있고 평화기념관이 없는 현실을 대다수가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수치스러워한다는 사실도 함께. 이제 남은 것은 ‘네트워킹’이다.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준비위원회’가 단단한 뿌리를 박고 곧 가동된다면, 새로운 브랜드의 강력한 ‘평화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의 02-3765-5810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사진/ 이날 워크숍 참석자들은 ‘박제된 물건들이 전시되는 곳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서의 평화박물관을 강조했다.
평화박물관 운동은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한겨레21>과 함께 해온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2000년 6월부터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쾌척한 7천만여원을 종자돈 삼아 베트남전 전쟁피해 지역에 평화역사관 건립 계획을 세워온 바 있다. 그러나 이날의 워크숍은 그동안의 평화역사관 건립운동을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벌여온 베트남 평화운동을 수렴하지만, 그 폭이 대거 확장된 범국민 평화운동 차원의 평화박물관 운동을 제안하는 자리였다. 첫 발제자로 나선 이대훈(평화학 연구자·참여연대 협동처장)씨는 “평화박물관은 기존 ‘전쟁박물관’ 관행에 대한 대안으로서 반전평화의 가치를 분명히 하면서 사회적 기억운동을 본격 개척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박물관에 대해 “국가의 후원 속에 제도교육과 결합해 전쟁을 찬양하고 전쟁의 불가피성을 은근히 홍보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질서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할 평화박물관은 ‘분쟁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주는 사회적 공간’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평화박물관, 미국 시카고와 일본 리쓰메이칸대학의 평화박물관을 소개한 이대훈씨는 평화박물관 운동이 ‘시설물 운동’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설과 전시물로 출발하되 ‘생활 속으로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자. 거창한 공간을 짓는 것도 좋지만 학교나 상점의 한 귀퉁이나 통로를 정해 ‘평화의 계단’, ‘이라크 어린이를 생각하는 공간’ 따위를 방방곡곡 만든다면, 평화박물관의 사회적 효과가 생활 속에서 잔잔하게 확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박제된 물건들이 전시되는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을 강조했다. 정기용(건축가·기용건축 대표)씨의 두 번째 발제는 전쟁과 평화와 관련된 100여장의 슬라이드쇼로 시작됐다. ‘건축의 철학자’답게, 그가 펼친 사진과 이야기는 참가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인가? 그럼 전쟁 없는 지금의 한반도는 평화로운가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누군가 계속 물고늘어질 것인데 평화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평화의 반대말은 비평화이며, 전쟁의 반대말은 비전쟁이 아닌가?” 그는 프랑스 파리의 유태인 순교자 기념관과 스웨덴 스톡홀롬의 우들랜드 묘지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관람객들의 감각을 깨우는 박물관 건축의 미학을 설명하기도 했다.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박물관을”

사진/ 발제자로 나선 평화학 연구자 이대훈씨와 건축가 정기용씨,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왼쪽부터)

사진/ 1925년 베를린에 세워졌던 세계 최초의 반전 평화박물관. 1933년 나치군에 의해 파괴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