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의 문제는 이미 비정규직 교수 전체의 문제다. 계약교수, 초빙교수, 연구교수, 기금교수, BK21교수 따위의 헷갈리는 명칭으로 전임교수를 위장한 시간강사가 엄청나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의재벌’이라는 자조적인 농담과 함께 일주일에 열다섯 시간 이상 강의하는 전업 시간강사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객관적인 확률과는 상관없이 주관적으로는 언젠가 전임교수가 될 거라는 의지적 낙관주의를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시절이었고, 아마 지나간 나날은 다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편리한 망각의 법칙 때문에, 강사시절의 비참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양적으로야 중고생을 사교육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 받았던 수입이 훨씬 많았지만, 그래도 늘 주수입은 강사료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다만 내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짠 시간표를 통보하는 관행 탓에, 어느 학기엔가는 30분 간격으로 두 대학을 다녀야 했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사실은, 몇푼의 강사료를 위해 본의로!) 학생들의 수업시간을 잘라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것이 강사시절 내가 지은 유일한(?) 죄였다면, 내게 가장 큰 설움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전통보 없이 강의시간을 줄이거나 심지어 해고해버리는 학교 당국의 무신경함도, 교통혼잡으로 늦은 수업에 들어가면서 출근부를 관리하는 직원에게 일찍 다니라는 훈계조의 불평을 들었던 것도 아니라, 꼬박꼬박 ‘강사님’이라고만 부르던 어느 학생의 호칭법이었다. 한 인문학도의 자살, 그의 진정한 실존적 고민이 과연 무엇이었던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그의 죽음의 원인은 시간강사의 열악한 경제적 처지 때문인 것으로 정리돼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를 계기로 시간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지적들이 있었지만, 사족이나마 덧붙였으면 한다. 먼저 시간강사의 문제는 이미 ‘시간강사’만의 문제가 아닌 비정규직 교수 전체의 문제라는 점이다. 강의전담교수, 계약교수, 초빙교수, 연구교수, 기금교수, BK21교수, 석좌교수 따위의 헷갈리는 명칭으로 전임교수를 위장한 시간강사가 엄청나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만 200개에 가까운,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대학입학 정원이 많아진 세태임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에 대해 갖고 있는 막연한 동경이나 허영심을 이용하여, 대학은 인건비 절감해서 좋고 교육부는 적당히 눈감아주고, 정년보장 받은 전임교수는 당장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므로 외면하는 상황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둘째, 시간강사의 문제를 예컨대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경제논리로만 접근하는 것은 자칫 스스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책임시간이 9시간이고 시간당 강사료가 얼마이므로, 그것을 전임교수의 월급과 비교하면 10분의 1이라거나 하는 식의 산술은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학생모집이 안 된다는 이유로 월급 100만원에 재계약을 강요하는 대학이 나오는 형편에, 이로부터 역산하여 강사료도 오히려 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단 관계자가 나오지나 않을까? 교육관료와 사학재단의 결탁 셋째, 시간강사가 교수로 가는 과도단계가 아니라 자기완결적인 직업으로 돼버린 현실에서 진정한 문제는 대학교육에 불어닥쳤던 시장논리,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논리의 필연적 귀결로서 생겨났다는 점이다. 좋아서 선택한 길이면서 왜 경제적 안정성까지 사회가 책임져야 하느냐, 좀더 솔직히 말해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니냐는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은, 결국 경쟁의 결과는 개별 주체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전형적인 시장논리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강사료를 몇% 올리고 안 올리고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년 동안 똑같은 강의노트로 버티면서 논문 하나 안 쓰는 교수”로 상징되는 대학경쟁력 강화론의 뒤편에는 사사건건 간섭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대학자율을 내세우는 교육관료와, 연구실적 부족은 용서해도 내 돈 내서 만든 내 대학에 맞서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사학재단의 암묵적 결탁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비정규직 교수의 존재를 자신의 영향력 확대의 방편으로 삼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는 일부 전임교수들도 가담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시간강사 처우개선은 아무런 의미도 실효성도 없을 것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아마 그것이 강사시절 내가 지은 유일한(?) 죄였다면, 내게 가장 큰 설움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전통보 없이 강의시간을 줄이거나 심지어 해고해버리는 학교 당국의 무신경함도, 교통혼잡으로 늦은 수업에 들어가면서 출근부를 관리하는 직원에게 일찍 다니라는 훈계조의 불평을 들었던 것도 아니라, 꼬박꼬박 ‘강사님’이라고만 부르던 어느 학생의 호칭법이었다. 한 인문학도의 자살, 그의 진정한 실존적 고민이 과연 무엇이었던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그의 죽음의 원인은 시간강사의 열악한 경제적 처지 때문인 것으로 정리돼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를 계기로 시간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지적들이 있었지만, 사족이나마 덧붙였으면 한다. 먼저 시간강사의 문제는 이미 ‘시간강사’만의 문제가 아닌 비정규직 교수 전체의 문제라는 점이다. 강의전담교수, 계약교수, 초빙교수, 연구교수, 기금교수, BK21교수, 석좌교수 따위의 헷갈리는 명칭으로 전임교수를 위장한 시간강사가 엄청나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만 200개에 가까운,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대학입학 정원이 많아진 세태임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에 대해 갖고 있는 막연한 동경이나 허영심을 이용하여, 대학은 인건비 절감해서 좋고 교육부는 적당히 눈감아주고, 정년보장 받은 전임교수는 당장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므로 외면하는 상황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둘째, 시간강사의 문제를 예컨대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경제논리로만 접근하는 것은 자칫 스스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책임시간이 9시간이고 시간당 강사료가 얼마이므로, 그것을 전임교수의 월급과 비교하면 10분의 1이라거나 하는 식의 산술은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학생모집이 안 된다는 이유로 월급 100만원에 재계약을 강요하는 대학이 나오는 형편에, 이로부터 역산하여 강사료도 오히려 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단 관계자가 나오지나 않을까? 교육관료와 사학재단의 결탁 셋째, 시간강사가 교수로 가는 과도단계가 아니라 자기완결적인 직업으로 돼버린 현실에서 진정한 문제는 대학교육에 불어닥쳤던 시장논리,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논리의 필연적 귀결로서 생겨났다는 점이다. 좋아서 선택한 길이면서 왜 경제적 안정성까지 사회가 책임져야 하느냐, 좀더 솔직히 말해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니냐는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은, 결국 경쟁의 결과는 개별 주체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전형적인 시장논리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강사료를 몇% 올리고 안 올리고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년 동안 똑같은 강의노트로 버티면서 논문 하나 안 쓰는 교수”로 상징되는 대학경쟁력 강화론의 뒤편에는 사사건건 간섭하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대학자율을 내세우는 교육관료와, 연구실적 부족은 용서해도 내 돈 내서 만든 내 대학에 맞서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사학재단의 암묵적 결탁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비정규직 교수의 존재를 자신의 영향력 확대의 방편으로 삼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는 일부 전임교수들도 가담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시간강사 처우개선은 아무런 의미도 실효성도 없을 것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