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축협노조 제주양봉축협지부 최후의 노조원 김영심·김신자·정향숙씨의 악과 깡
전국축협노동조합 제주양봉축협지부에 처음 연락을 했을 때, 정향숙씨는 “절대로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사흘 동안이나 마다했다. 나는 “무작정 제주도에 갈 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애원했는데, 약속 하루 전날 정향숙씨가 전화를 했다. “지금 제주지역에서 파업 중인 사업장이 두곳 있는데, 오셔서 교육 좀 해주세요. 농성천막에서 해야 하는 강의라 환경은 열악할 거예요.” 그 교육을 하지 않으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표현만 없었을 뿐, 이것은 상호주의에 입각한 위협이나 다름없다. 퍼시픽호텔과 로얄호텔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설립한 ‘금자탑노동조합’과 안마사로 일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설립한 ‘제주통합안마원노동조합’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농성천막에서 두 시간 강의를 하고 나서야 어렵사리 세 사람의 여성 투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양봉지부 조합원이지만…
“오늘이 파업 며칠째지요?” “354일째요.” 마치 합창하듯 한 박자의 어긋남도 없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파업일자를 헤아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 지 벌써 354일째다. 단 세 사람뿐인 조직이 그 긴 파업을 이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부장 김영심(31)씨에게 상투적으로 물어본 부모님 이야기에서도 우리 역사의 아픔은 뚝뚝 묻어 떨어진다. “4·3사건 때 아버님쪽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고모님 한분만 남았어요. 대학 다니면서 4·3사건이나 노동문제에 대해 새로 깨달은 내용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노인회나 계모임에 가셔서 다른 어른들을 설득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셨어요.” 부지부장 김신자(32)씨의 부모님은 양봉업을 하신다. 당연히 제주양봉축협의 조합원이고 임원도 지내셨다. 일반 회사로 치자면 기업 임원의 딸이 노동조합 간부로 ‘방방 뛰는’ 형국이지만, 아버님은 딸에게 “네가 그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축협 출자금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무장 정향숙(29)씨의 부모님은 과수원을 하신다. “이번에 밭 하나 갈아엎었어요. 열매도 따지 않은 귤나무들을 다 뽑아버렸어요. 귤 따야 할 무렵에 동생 일로 과수원에 가압류가 들어왔거든요. 25년 동안 키운 밭을 한순간에 갈아엎었어요.” 이 대목에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정향숙씨의 동생은 지난 한라병원 파업에 참여했다가 부모님과 친척의 재산까지 가압류당했다고 매스컴에 보도된 바로 그 사람이다. 세 사람은 모두 1997년 초에 제주양봉축협에 취업했고, 노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99년 1월28일이다. 노조 가입 대상 35명 전원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김영심씨는 부위원장을 맡았고 두 사람은 그때까지만 해도 평조합원이었다. 99년 4월에 전국단위 축협노조가 설립되면서 전국축협노동조합 제주양봉축협지부로 바뀌었고, 김영심씨는 서울 본부노조 사무실로 올라가 여성부장, 여성국장, 부위원장을 차례로 지냈다. 2002년 초부터 제주지부의 간부들이 조합원들과 별다른 협의도 없이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합의하는 등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바람에 조합원들의 불신이 쌓였다. 2002년 6월에 김영심씨가 서울 본부노조 전임을 마치고 제주에 내려왔을 때, 제주지부에는 조합원이 단 세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박봉에서 조합비만 떼인다고 생각했고, 축협 전무가 나서서 직원들에게 노조 탈퇴를 강요하자 축협 간부들과의 연줄이 있는 사람이 많은 조합원들은 대부분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무라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걸까요?” 답은 간단했다. “이기적인 사람인 거지요.” “왜 그때 노조에서 탈퇴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노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큰소리치는 것보다 노동조합 자격으로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물론 그 당연한 명제를 알고 있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과연 끝까지 남은 조합원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앰프, 일당백 김영심 새 출발 하자는 각오로 김영심씨가 제주지부 지부장, 김신자씨가 부지부장, 정향숙씨가 사무장을 맡았다. ‘전 조합원의 간부화’가 이뤄진 셈이다. 2002년 6월24일, 전국축협노조는 상경 파업에 돌입했다. 전국에 있는 축협노조 조합원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서 파업을 벌이는 것이다. 김영심 지부장은 제주양봉축협의 전무에게 “24일까지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조합원 세 사람은 모두 서울에 올라가 파업에 참여한다”고 통보했다. 전무는 “꿀 검사도 해야 하는 시기이니 24일 하루만 갔다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고 김영심 지부장은 “올라가봐야 안다”고 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파업이 지금까지 354일째 이어지고 있다. 나중에 파업 방침이 지역별 투쟁으로 변경되면서 세 사람은 7월 중순에 제주도로 내려왔다. 다른 지역은 대부분 가을 무렵 파업이 끝났지만 제주지부는 변함없이 그 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세 사람은 2002년 8월1일자로 해고됐다. 파업에 참여하느라고 무단결근을 했다는 것이 해고사유였다. 그 해고에 대해서는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지금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다. 제주양봉축협에서는 세 사람을 해고한 뒤 “교섭할 노조원이 없으니 교섭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법률적으로 세 사람의 조합원 자격이 계속 유지된다는 걸 알고는 교섭에 응했다. 교섭이 몇 차례 이어지다가 한국양봉축협과 합병이 얘기되는 와중에서 2003년 1월9일 드디어 “세 사람을 복직시키고, 임금도 모두 지급한다”는 내용이 복직합의서를 체결했지만, 제주양봉축협쪽에서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희망퇴직을 신청했으니, 세 사람도 희망퇴직을 신청하라”고 요구하면서 복직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파업 이후 354일 동안 임금을 한푼도 못 받았을 텐데, 어떻게 살았어요?” “그동안 모은 돈 까먹으면서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지요.” “지난 5월, 본부노조에서 생계비가 약간 지원돼서 이제 숨 좀 쉬고 있어요. 하하.”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으랴만 대답하는 표정 속에는 바늘 끝만큼의 어둠도 없다. 요즘 제주지역 투쟁 현장에서는 세 사람 중에 한명이라도 안 보이면 사람들이 안부를 묻는다. 출산예정일을 불과 며칠 앞둔 만삭의 몸인 김영심 지부장만 잠깐 활동을 쉬고 있다. 세 사람에 대한 평을 각각 들어봤다. 김영심씨는 한마디로 ‘짱깜’이다. “지도력이 있어요. 한라병원 파업할 때 노조 지도부가 용역깡패들에게 둘러싸여 갇혀 있는 상황에서 지부장님이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8시간 동안 앰프시설도 없이 대오를 이끌었어요. 경찰들도 다 놀랐어요. 제주도에 이런 사람 없다고…. 그때 붙여진 별명이 인간 앰프, 일당백이에요.” 김신자씨는 무엇보다 사람이 좋다. “꼼꼼한데다 세심한 관찰력과 예리한 판단력이 있어요. 성격이 좋아요. 누구든지 선입견 갖지 않고 보는 사람이에요.” 30년보다 더 꽉 찼던 1년의 시간 정향숙씨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다. “추진력 있고 불의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딱 이거다 싶으면 계속 밀고 나가고, 아니다 싶으면 거기서 바로 끊어요.” 정향숙씨는 대학에서 카지노 경영에 관한 특수관광산업을 전공했다. 블랙잭, 룰렛, 바카라, 테이블·논테이블 게임들이 모두 그의 손 안에 있다. “교수님들도 내가 손이 좀 빠르니까 당연히 그쪽 전공을 살릴 줄 알고 계셨어요. 카지노에 있었으면 돈 많이 벌고 시집도 갔을 거예요. 지금도 원하면 취업할 수는 있지만, 미련은 없어요.” 마지막 말을 한마디씩 부탁했다. “우리가 제도 싸움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 권한을 넘겨버린 잘못 때문에 우리 일이 어려워진 것인데, 그 잘못에 대한 판단을 다시 지방노동위원회에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부당하잖아요. 노동자는 정말 악으로, 깡으로 싸워야 하지만 제도권에서 겨룰 수 있는 역량도 동시에 갖춰나갔으면 좋겠어요.” “30년 동안 살면서 느꼈던 것보다 1년 동안 더 많이 느끼고 배웠어요.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든지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노동운동에도 남녀차별이 있더라고요. 얘기하다가 무심코 여성 동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런 꼴 진짜 못 봐주거든요.” 이야기를 마치고 녹음기를 주섬주섬 챙기는데,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그냥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것이 354일의 파업을 지켜온 작은 원칙이다. 글·사진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지난해 6월24일부터 354일째 외롭게 파업 중인 전국축협노조 제주양봉축협지부 3인. 왼쪽부터 정향숙 사무장, 김신자 부지부장, 김영심 지부장.
지부장 김영심(31)씨에게 상투적으로 물어본 부모님 이야기에서도 우리 역사의 아픔은 뚝뚝 묻어 떨어진다. “4·3사건 때 아버님쪽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고모님 한분만 남았어요. 대학 다니면서 4·3사건이나 노동문제에 대해 새로 깨달은 내용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노인회나 계모임에 가셔서 다른 어른들을 설득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셨어요.” 부지부장 김신자(32)씨의 부모님은 양봉업을 하신다. 당연히 제주양봉축협의 조합원이고 임원도 지내셨다. 일반 회사로 치자면 기업 임원의 딸이 노동조합 간부로 ‘방방 뛰는’ 형국이지만, 아버님은 딸에게 “네가 그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축협 출자금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무장 정향숙(29)씨의 부모님은 과수원을 하신다. “이번에 밭 하나 갈아엎었어요. 열매도 따지 않은 귤나무들을 다 뽑아버렸어요. 귤 따야 할 무렵에 동생 일로 과수원에 가압류가 들어왔거든요. 25년 동안 키운 밭을 한순간에 갈아엎었어요.” 이 대목에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정향숙씨의 동생은 지난 한라병원 파업에 참여했다가 부모님과 친척의 재산까지 가압류당했다고 매스컴에 보도된 바로 그 사람이다. 세 사람은 모두 1997년 초에 제주양봉축협에 취업했고, 노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99년 1월28일이다. 노조 가입 대상 35명 전원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김영심씨는 부위원장을 맡았고 두 사람은 그때까지만 해도 평조합원이었다. 99년 4월에 전국단위 축협노조가 설립되면서 전국축협노동조합 제주양봉축협지부로 바뀌었고, 김영심씨는 서울 본부노조 사무실로 올라가 여성부장, 여성국장, 부위원장을 차례로 지냈다. 2002년 초부터 제주지부의 간부들이 조합원들과 별다른 협의도 없이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합의하는 등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바람에 조합원들의 불신이 쌓였다. 2002년 6월에 김영심씨가 서울 본부노조 전임을 마치고 제주에 내려왔을 때, 제주지부에는 조합원이 단 세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박봉에서 조합비만 떼인다고 생각했고, 축협 전무가 나서서 직원들에게 노조 탈퇴를 강요하자 축협 간부들과의 연줄이 있는 사람이 많은 조합원들은 대부분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무라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걸까요?” 답은 간단했다. “이기적인 사람인 거지요.” “왜 그때 노조에서 탈퇴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노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큰소리치는 것보다 노동조합 자격으로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물론 그 당연한 명제를 알고 있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과연 끝까지 남은 조합원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앰프, 일당백 김영심 새 출발 하자는 각오로 김영심씨가 제주지부 지부장, 김신자씨가 부지부장, 정향숙씨가 사무장을 맡았다. ‘전 조합원의 간부화’가 이뤄진 셈이다. 2002년 6월24일, 전국축협노조는 상경 파업에 돌입했다. 전국에 있는 축협노조 조합원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서 파업을 벌이는 것이다. 김영심 지부장은 제주양봉축협의 전무에게 “24일까지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조합원 세 사람은 모두 서울에 올라가 파업에 참여한다”고 통보했다. 전무는 “꿀 검사도 해야 하는 시기이니 24일 하루만 갔다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고 김영심 지부장은 “올라가봐야 안다”고 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파업이 지금까지 354일째 이어지고 있다. 나중에 파업 방침이 지역별 투쟁으로 변경되면서 세 사람은 7월 중순에 제주도로 내려왔다. 다른 지역은 대부분 가을 무렵 파업이 끝났지만 제주지부는 변함없이 그 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세 사람은 2002년 8월1일자로 해고됐다. 파업에 참여하느라고 무단결근을 했다는 것이 해고사유였다. 그 해고에 대해서는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지금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다. 제주양봉축협에서는 세 사람을 해고한 뒤 “교섭할 노조원이 없으니 교섭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법률적으로 세 사람의 조합원 자격이 계속 유지된다는 걸 알고는 교섭에 응했다. 교섭이 몇 차례 이어지다가 한국양봉축협과 합병이 얘기되는 와중에서 2003년 1월9일 드디어 “세 사람을 복직시키고, 임금도 모두 지급한다”는 내용이 복직합의서를 체결했지만, 제주양봉축협쪽에서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희망퇴직을 신청했으니, 세 사람도 희망퇴직을 신청하라”고 요구하면서 복직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파업 이후 354일 동안 임금을 한푼도 못 받았을 텐데, 어떻게 살았어요?” “그동안 모은 돈 까먹으면서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지요.” “지난 5월, 본부노조에서 생계비가 약간 지원돼서 이제 숨 좀 쉬고 있어요. 하하.”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으랴만 대답하는 표정 속에는 바늘 끝만큼의 어둠도 없다. 요즘 제주지역 투쟁 현장에서는 세 사람 중에 한명이라도 안 보이면 사람들이 안부를 묻는다. 출산예정일을 불과 며칠 앞둔 만삭의 몸인 김영심 지부장만 잠깐 활동을 쉬고 있다. 세 사람에 대한 평을 각각 들어봤다. 김영심씨는 한마디로 ‘짱깜’이다. “지도력이 있어요. 한라병원 파업할 때 노조 지도부가 용역깡패들에게 둘러싸여 갇혀 있는 상황에서 지부장님이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8시간 동안 앰프시설도 없이 대오를 이끌었어요. 경찰들도 다 놀랐어요. 제주도에 이런 사람 없다고…. 그때 붙여진 별명이 인간 앰프, 일당백이에요.” 김신자씨는 무엇보다 사람이 좋다. “꼼꼼한데다 세심한 관찰력과 예리한 판단력이 있어요. 성격이 좋아요. 누구든지 선입견 갖지 않고 보는 사람이에요.” 30년보다 더 꽉 찼던 1년의 시간 정향숙씨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다. “추진력 있고 불의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딱 이거다 싶으면 계속 밀고 나가고, 아니다 싶으면 거기서 바로 끊어요.” 정향숙씨는 대학에서 카지노 경영에 관한 특수관광산업을 전공했다. 블랙잭, 룰렛, 바카라, 테이블·논테이블 게임들이 모두 그의 손 안에 있다. “교수님들도 내가 손이 좀 빠르니까 당연히 그쪽 전공을 살릴 줄 알고 계셨어요. 카지노에 있었으면 돈 많이 벌고 시집도 갔을 거예요. 지금도 원하면 취업할 수는 있지만, 미련은 없어요.” 마지막 말을 한마디씩 부탁했다. “우리가 제도 싸움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 권한을 넘겨버린 잘못 때문에 우리 일이 어려워진 것인데, 그 잘못에 대한 판단을 다시 지방노동위원회에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부당하잖아요. 노동자는 정말 악으로, 깡으로 싸워야 하지만 제도권에서 겨룰 수 있는 역량도 동시에 갖춰나갔으면 좋겠어요.” “30년 동안 살면서 느꼈던 것보다 1년 동안 더 많이 느끼고 배웠어요.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든지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노동운동에도 남녀차별이 있더라고요. 얘기하다가 무심코 여성 동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런 꼴 진짜 못 봐주거든요.” 이야기를 마치고 녹음기를 주섬주섬 챙기는데,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그냥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것이 354일의 파업을 지켜온 작은 원칙이다. 글·사진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