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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원폭2세’ 김형률의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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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12 00:00 수정 : 2008-11-2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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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피폭에 의한 자신의 병력 밝히고 국가 차원의 실태조사와 대책마련 호소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는 일본의 침략을 받은 피억압 민족이었던 ‘한국인’이라는 점과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원폭 피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함께 안고 있다. 말하자면 인류가 20세기 들어와서 직면하게 된 ‘제국주의’와 ‘핵’이란 최대의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떠맡은 것이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다.”(이치바 준코, 계간 <역사비평> 1999년 겨울호 중에서)

재일 한국인, 전체 피폭자의 10%

사진/ 김형률씨는 ‘커밍아웃’과 함께 ‘한국원폭2세환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원폭 피해 2세대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박승화 기자)
키 163cm, 몸무게 37kg. 깡마른 체구에 유난히 안경이 커 보이는 김형률(34·부산시 동구 수정동)씨는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을 앓고 있는 ‘원폭 2세’다. 김씨의 어머니는 지난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6살 나이에 방사능 피폭을 당했다. 피폭 1세대인 어머니는 한평생 악성 종양과 피부병에 시달렸고, 피폭 2세대인 그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은 생후 1년6개월 만에 폐렴으로 숨졌다. 김씨 역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폐렴으로 지금까지 10여 차례 입원치료를 받았다. 반복된 발병으로 그의 폐는 이미 70%의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다.

지난해 3월22일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앓고 있는 폐 질환과 재생 불량성 빈혈, 세균성 중이염 등이 모두 방사능 피폭에 의한 유전병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무게만큼이나 원폭 피해 2세대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놓기가 어려웠기 때문일까?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을 하루 앞둔 6월5일 오후 그를 만났을 때, ‘커밍아웃’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여러 차례 흘러나왔다.


김씨는 “피폭 2세들은 유전적 질환이 있을지 모른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결혼이나 취업, 심지어 보험가입까지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커밍아웃’과 함께 ‘한국원폭2세환우회’(cafe.daum.net/KABV2PO)라는 단체를 만들어 원폭 피해 2세대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이유다.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약 42만명이 피폭을 당했으며, 이 가운데 약 1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가사키에서도 약 27만명이 피폭을 당했고, 이 가운데 약 7만4천명이 피폭사했다. 이들 원폭 피해자들 가운데는 히로시마에서 약 5만명(피폭사 3만명), 나가사키에서 약 2만명(피폭사 약 1만명)의 재일 한국인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체 피폭자의 약 10%에 달하는 수치다.

그러나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존재는 그동안 철저히 무시돼왔다. 일본 정부와 히로시마·나가사키시는 30여 차례나 피폭자 실태조사를 실시했지만,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한국 원폭 피해자는 식민지 시대 징용 끌려가 겪은 고통과 원폭 피해, 그리고 역사와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은 지난 58년 세월이라는 3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57년 ‘원자폭탄 피폭자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데 이어 1968년에는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내놓는 등 자국 원폭 피해자 35만여명에게 수십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원해왔다. 1998년 한해만도 피폭자 지원 예산으로 1600만엔(약 1조6천억원)을 사용했다. 김씨는 “그러나 한국 원폭피해자들에게는 1991년과 1993년에 각각 17억엔과 23억엔 등 모두 40억엔(약 400억원)의 ‘민간기금’을 내놨을 뿐 일본 정부 차원의 공식 배상이나 실태조사는 전무했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에 진정서 제출할 계획

원폭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 등 대책마련 노력이 전무한 것은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199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한국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서 정도가 그나마 유일한 관련자료다. 당시 조사결과, 원폭 피해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피폭 2세대는 23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김씨는 지난 5월에 이어 최근 다시 서울을 찾았다. 약 봉지와 자료 더미가 가득 담긴 가방은 지친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7월 초에는 △한국 원폭 피해자에 대한 생존권·의료권 보장 △원폭 피해자 및 그 2세에 대한 실태조사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진정서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그는 “원폭 피해자 문제는 피폭 1세대는 물론 2세대, 3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 문제다.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원폭 피해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실태조사와 원호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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