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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억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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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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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미래학자들이 한국 등 아시아의 비약적인 발전과 도전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사람은 신분상승욕이 강하고 시간을 자주 무시하며 과거를 잘 잊는 습관이 있다는 연구결과이다.

사진/ 교도연합
월드컵 1주년을 기념해 열린 한·일전에서 한국팀이 짜릿한 승리를 거둔 것은 국민 모두에게 기쁨이었다. 그러나 경기가 열리고 있던 시각, 서울 시청 앞 광장에는 ‘붉은 악마’들이, 바로 옆 광화문 네거리에는 의정부 여중생을 추모하고 소파개정을 요구하는 ‘촛불’들이 각각 물결을 이뤘던 대조적인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찌감치 방송과 신문들은 상당한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 월드컵 분위기를 달궈왔고, 우리 모두 서서히 그 열기에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해 온 국민을 환희와 감동에 젖게 했고 ‘하나됨’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월드컵의 의미에 흠집을 낼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지난해 많은 것들이 월드컵 함성에 묻혔듯이, 혹시라도 우리가 월드컵 1주년 때문에 또다시 많은 것을 그냥 지나치거나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봤으면 하는 것이다.

6월 하면 떠오르는 일이 어디 월드컵뿐인가. ‘서해교전’ 1년이 다가오면서 다시 서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나 남북 공동어로구역 설정은 논의조차 요원하다. 여중생 사망사건 1주기를 맞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굴복’시킨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특검 수사가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6·15 남북정상회담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향후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할 일이다. 6·10 항쟁의 우렁찬 함성은 간 데 없고 기념식장 마이크 소리만 울려 퍼지다 끝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이 무료 입장하는 고궁이나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둘러봐야 한다. 대구지하철 참사 100일 추모제는 이미 유족들만의 행사로 끝이 났고 보상협상조차 마무리되지 않아 그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글머리에서 인용한 미국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해석이 뒤따르고 있다. 신분상승욕은 곤궁한 처지를 개선시키려는 의지이고, 시간 무시는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시간을 희생한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해석됐다. 망각 습관도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향한다는 역동적인 의미로 풀이됐다. 외국 학자들이 연구한 한국인의 특징이란 점에서 보편 타당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연구결과인 것 같다. 특히 ‘망각 습관’ 풀이는 너무 미화한 느낌마저 준다. 우리에겐 망각의 늪에서 깨어나 ‘관심과 참여’를 통해 해결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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