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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배옥병] “학부모는 노조간부처럼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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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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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말하는 ‘서통’해고자 출신 배옥병씨

배옥병(47)씨와 함께 나눴던 이야기가 녹음된 테이프를 몇번이나 들으면서 “도대체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버릴 내용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배옥병씨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밀도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그이의 어릴 적 이야기부터 옮겨야겠다. “칠갑산이 있는 마을에서 자랐어요. 5남매의 장녀였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정형편이 힘들어져서… 학교를 더 이상 다닐 거냐, 말 거냐 그렇게 됐거든요.” 목소리가 떨리는가 싶더니 금세 울음이 섞여 나오면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머슴아 동생 두명을 두살 때부터 제가 키웠어요. 농사짓고, 밭 매고, 논 매고, 나무하면서… 엄마노릇 다 했어요.” 배옥병씨는 또 목이 잠겼고, 듣고 있는 나도 숨을 고르느라 애썼다.

조직하기 위해 ‘자취’를 생각하다


양심수 특별전형으로 성공회대에 입학한 배옥병씨(왼쪽). 눈물겨운 한을 기어이 풀었지만 노동자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류우종 기자)
명절 때만 되면 서울 구로공단에서 내려온 관광버스 귀향행렬 수십대가 보란 듯이 마을 앞을 지나는 모습을 몇해 동안 지켜보다가 19살 되던 1975년 추석에 서울로 올라와 (주)서통에 취업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만 하는 모범사원이었지요?” 그동안 다른 노동자들을 만난 경험을 무기 삼아 나는 그렇게 물었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언제 미싱 탈까 그 생각만 했어요. 미싱사 언니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어요. 꽤 안 부리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언니들 잠 잘 때 나가서 열심히 배웠어요.”

어느 날 외출 나갔다오던 친구들이 새문안교회 대학생들이 개설한 ‘새얼峠鬼??광고전단을 받아왔다. 유종일씨(현 KDI 국제대학원 교수) 같은 사람들이 그때 야학교사였다.

“사람들을 조직하려면 자취를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기숙사 밥은 말도 못 하게 불결하고 모두들 너무 지겨워했어요. 라면·수제비도 瀏린?좋아했는데, ‘야, 우리집에 뭐 먹으러 가자’ 그런 핑계로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활동이 80년 봄을 맞았다. 기숙사 옥상 뙤약볕에 1500명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부와 회사 사람들이 밧줄을 타고 옥상에 올라오고, 밀고 당기고 하다가 문이 부서져 찻길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에게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는 바람에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부상자가 50여명이나 생기고, 며칠 동안 밥도 안 먹은 상태에서 최루탄을 맞고 기절한 배옥병씨를 빼앗길까봐 잔디밭에 눕힌 채 노동자들의 농성이 진행됐다.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은 거의 죄악이다. 5월17일 밤 10시에 노조를 설립하고 배옥병씨가 위원장을 맡은 지 두 시간 뒤에 계엄령 전국확대가 선포됐으니 계엄령과 동시에 시작된 노동조합이 그 뒤 겪은 일들을 이 제한된 원고에서 몇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2월8일, 군복 입은 여자들이 집으로 찾아오더니 배옥병씨를 서빙고 합동수사본부로 데려갔다. 28일 동안 조사를 받는 동안 노동조합 사무실은 X자로 못을 박은 채 폐쇄됐고 회사에서는 하루에 3번씩 안기부, 노동부, 회사가 “배옥병은 빨갱이라 사형당할 것이고, 나머지 포섭된 사람들은 무기징역 아니면 최소한 20년형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하는 교육이 자행됐다. 그때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난 사람들은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을 미안해한다. 자기는 너무 무서웠노라고, 그러다가 자기들도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것이 지금까지 평생 자신을 짓누르는 죄의식이라고 사람들은 지금도 만나 서로 얘기하며 눈물짓는다.

배옥병씨는 평조합원 신분이 됐지만 노동절 행사를 치르고, 임금인상 투쟁과 노보 ‘상록수’를 만드는 활동을 하느라 잠시의 쉴 틈도 없었다. 그러다가 81년 6월에 국가보위특별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배옥병씨의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이 그 무렵이다. 나는 당시 배옥병씨와 함께 구속됐던 활동가 이목희씨에게 더 주목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처음 적용된 사례였고, 나 역시 그런 ‘제3자’의 아류였기 때문이다.

80년대, 그녀의 눈부신 광채를 기억하네

노동운동을 경험한 이라면 모두가 기억하는 ‘맥스테크 노동조합’ 사건 당시의 걸개그림. 배옥병씨와 깊은 연관을 지닌 사건이다.
배옥병씨는 1년6개월 만기 출소한 뒤 바로 해고됐다. 구속된 날 이후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60명쯤이 모여서 이틀 밤을 얘기로 샜어요. 그런데 해고 경험이 열번도 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기숙사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통’ 해고자라고 알려지면 바로 해고되고, 기숙사에서 이불 보따리 들고 나와서 그 밤에 갈 데가 없었다는 거예요.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인데 그 짐을 들고 밤길을 헤맸다는 거예요. 나는 감옥에 있으면서 오히려 더 편했던 거에요….” 우리는 또 울었다.

80년대 초 어느날, 인천의 광야서점에서 배옥병씨를 처음 봤다. 그 서점을 경영하던 후배가 짙은 감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서가의 책을 살피고 있던 한 여성을 가리키며 “바로 그 유명한 서통의 배옥병씨”라고 넌즈시 가르쳐주었다. 잠깐 스치듯 훔쳐본 그 모습을 20년 넘는 세월 동안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까닭을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그 무렵 배옥병씨가 연애를 하고 있었던 거다.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부신 광채가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던 거다.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계속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YH의 박태연씨 소개로, 그 무렵 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들어갔다가 8·15특사로 막 세상에 나온 송병춘씨를 만나 이듬해 84년 1월에 결혼했다.

배옥병씨는 80년대 최초의 공개노동운동 조직 ‘노동자복지협의회’를 거쳐 ‘여성노동자회’에서 계속 활동했다. 처음부터 같이 시작한 ‘여성노동자회’ 10년 동안 밑에서부터 주욱 올라가 조직부장, 부회장, 회장을 지냈다.

88년 8월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여성단체연합’은 1회 권인숙씨 이래 2회 ‘올해의 여성상’으로 맥스테크노동조합을 선정했다. 그때 그림패 ‘둥지’가 그려서 내걸었던 걸개그림 <맥스테크 민주노조>를 사람들은 기억한다. 노동운동을 한다면서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 ‘맥스테크노동조합’ 사건은 배옥병씨가 처음에 상담하러 찾아온 사람을 만난 것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후일담이 끝나고, 배옥병씨가 지금 하고 있는 ‘새로운 지평의 대중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니까 말씨가 단연 활기를 띤다. 생각 같아서는 이번 기사를 1·2부로 나눠 두번에 걸쳐 쓰고 싶었다.

“95년도부터 학부모 자생단체 임원을 맡았고, 96년도에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정말 학교가 썩은 사회의 축소판 같다는 걸 알았어요. 대중이 어디에 있는지 딱 보면, 자신이 대중운동을 어嘲【?해야하는지 알 수 있어요.”

학교운영위 일을 훈련처럼…

도서실 활성화, 졸업앨범 공개입찰, 교복 공동구매, IMF 직후 대책 없이 늘어난 결식아동 지원, 위탁급식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교급식전국네트緇æ?건설 등 학교운영위원회 일을 배옥병씨는 모두 하나하나 훈련처럼 이뤄냈다. 아무리 작은 결정이라도 학급모임·학년모임을 거쳐 의견을 수렴했다. <학부모신문>도 만들어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눈앞에는 노동조합의 수많은 소모임과 상집회의 모습, 노보를 발간하던 배옥병씨의 모습이 자꾸 겹쳐졌다.

배옥병씨는 지금 대학생이다. 어릴 적 이야기를 굳이 앞에서 옮긴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어릴 적 눈물겨운 한을 기어이 풀었다. “97년에 여성노동자회 그만둔 뒤, 조금 시간여유가 생겼어요. 고민하다가 7개월 만에 중학교·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마쳤어요. 성공회대학교에 양심수 특별전형이 있다고 해서 사회과학부에 지원했는데, 뜻밖에 됐어요.” 그가 한 ‘고민’이란 노동자들에 대한 웬지모를 미안함이다.

상반기 동안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와 급식 식중독 사건들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학업을 게을리했다고 반성하는 그에게 ‘후배한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배옥병씨는 “내가 무슨…”이라면서 뒤로 뺐지만 나는 “피고에게 최후진술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라며 강권했다.

“지금 자기가 소속한 곳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계속 유지해나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생활 속의 운동을 일상화시키는 것이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밑거름이라 생각해요.” 배옥병씨를 만나고 나오면서 “지금 내 생활 속에서 일상화된 운동은 무엇일까?” 곰곰 생각했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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