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어린이돕기 캠페인’에 의사 자격으로 참가한 김양중 기자의 바그다드 진료일기
한겨레신문사가 벌이고 있는 ‘이라크어린이돕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나를 기자가 아닌 의사 자격으로 4차 의료진에 포함시켜 바그다드로 파견했다. 나는 그곳의 빈민촌과 난민촌, 그리고 의약품이 필요한 곳에 의약품을 공급했고 진료활동을 벌였다. 이전 1차에서는 바그다드에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는 가능성 및 진료의 가능성 여부를 조사하는 현장조사, 2차부터는 바그다드의 헬스센터에서 의료지원 및 진료활동을 펼쳐왔다. 2차에서는 송관욱(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이영욱·고수정(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회원)씨가 뉴바그다드의 헬스센터에서 진료를 시작했으며, 3차 팀은 임연(29·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손정석(29·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원), 변혜진(30·보건의료단체 연합 기획부장)씨 등이 암만에서 약을 구입해 바그다드로 들여오고 반전평화팀과 함께 뉴바그다드의 빈민촌에 약을 공급하고 진료활동을 펼쳤다. 보건의료단체연합 회원들은 5월 말까지 진료를 계속하며, 앞으로도 이라크 의사들과 함께 폐허가 된 이라크 의료를 복구해나갈 계획이다.
시내 곳곳엔 아직도 불길이…
암만에서 구입한 의약품 185상자와 한국에서 가져온 한의약품 및 재료 9상자, 그리고 우리 일행을 태운 승합택시 3대는 거의 보름달이 다 된 달이 비추고 있는 사막 사이로 난 바그다드로 향하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약품을 강탈당할 우려가 있어 5월12일 새벽 1시에 출발한 우리는 밤새 요르단과 이라크가 접해 있는 국경을 향해 달렸다. 동쪽 하늘부터 밝아올 무렵 요르단쪽 국경에 도착했다. 중간에 나와 이준혁(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회원)씨를 태운 승합택시의 타이어에 펑크가 나 타이어를 교체한 일을 제외하고는 제일 앞에 달렸던 김정범(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정경진(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회장)씨가 탄 승합택시와 약품만 가득 실은 차는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일단 도착한 것이다.
간단한 출국 절차를 거치고 이라크 국경이 열리는 7시까지 1시간 반 정도 기다렸다. 이라크 국경에서는 미군이 통관 절차를 맡고 있었고 총과 탱크 등으로 무장한 그들을 보니 전쟁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왔다는 말 때문인지, 이라크 의료지원을 위한 의사라고 해서 그랬는지 쉽게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이라크 땅을 접어든 순간부터는 낯설은 사막 풍경이기도 했지만 전쟁의 상처를 안은 땅이라 생각돼 안타까움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라크로 안전하게 들어오기 위해서 요르단 암만에서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국경을 쉽게 통과하기 위해 기자증, 세계보건기구 인증서, 이라크 비자 등을 준비하는데 하필 이곳 아랍권이 금요일(9일)이 휴일이라 준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이라크 대사관의 업무가 제각각이어서 아예 비자 없이 들어가기로 결정한 터라 국경을 넘어선 다음부터는 내심 많이 불안했다. 한편 우리를 태워 운전한 팔랏은 바그다드 출신으로 미군이 폭격한 현장 곳곳을 설명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고속도로 중간에 끊어진 다리며 버스며 건물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미군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바그다드로 들어설 때는 굳이 도로 표지판이 길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격으로 인한 잔해가 점차 심해지는 곳으로 방향을 돌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도시 곳곳은 폭격과 화재로 불탄 흔적으로 황폐화돼 있었고 아직도 시내 곳곳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회원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알라비 아파트는 전쟁 중에도 폭격을 하나도 맞지 않았고 현재는 미군이 탱크와 무장군인으로 보호하고 있는 팔레스티나 호텔 뒤편에 있었다. 먼저 와 있었던 임연(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손정석(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원), 변혜진(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부장)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약품을 아파트 안으로 옮기고 첫날 회의를 시작했다. 이곳 사정을 대강 파악한 뒤 나름대로의 업무 분장을 하고 첫날 밤을 맞았다. 간혹 총성이 들렸으나(나중에 알고 보니 밤마다 40~50건 정도의 총기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바그다드의 첫날 밤은 고요하게 지나갔다. 설사가 심하면 항생제를 처방한다?
둘쨋날(13일)은 바그다드에서 활동하고 있던 ‘반전평화팀’과 함께 이란에서 돌아온 쿠르드계 난민들이 살고 있는 빈민촌을 방문하게 됐다. 그동안 뉴바그다드의 알 마시텔에서는 암마르를 주도로 진료소를 만들기로 사전 협의된 상황이었다. 빈민촌은 거의 모든 집에 진흙 벽돌을 써서 만든 집이었고 하수도 시설은 거의 엉망이었으며 상수도도 15일에 한번씩 1시간 정도 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의료지원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우리를 붙잡고 서로 자기 집으로 가자고 이끌 정도였다. 아이들은 주로 맨발로 다녀 발에 상처가 많았고 발가락이 잘려나간 아이도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꽉 눌렀지만 실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냥 돌아와야 했다. ‘반전평화팀‘에 따르면 바그다드 외곽의 곳곳에서 이와 같은 참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예상보다 돌아온 시간이 늦어져 거의 점심도 먹지 못하고 진료소로 향했다. 벌써 주민들은 꽤 모여 있었으며 암마르, 의사인 캐림 등이 진료소를 차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환자들은 금세 몰려왔다. 환자는 주로 감기와 같은 급성호흡기 질환, 설사, 관절염과 같은 근골격계 질환 등을 앓고 있었으며 간혹 실명인 환자나 병원에서 진단받은 신장결석 환자, 동생의 머리 부분의 자기공명촬영 사진을 들고 와 치료해달라는 어느 소년, 화상을 심하게 입은 환자 등이 찾아오곤 해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곳 바그다드 사람들과의 통역을 맡아준 이는 이곳 이라크 의사인 캐림이었다. 환자와 직접 이야기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캐림은 친절하게 환자들에게 설명해줘서 안심이 됐다. 진료에서 공식적으로 손 뗀 지 일년이 지났으므로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공중보건의사 3년 동안 보아왔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한숨 놓았다. 다만 이라크 환자들과 의사들이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른 처방에 익숙해 있어 설명하느라 힘들었다. 옆에서 김정범 대표도 말이 잘 통하진 않지만 열심히 설명하고 처방하면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 주로 나이든 사람들과 여자 환자들을 땀을 훔치면서 열심히 보는 모습에서 젊은 나도 힘을 내게 됐다. 참고로 바그다드는 40도가 넘는 여름 날씨가 시작되고 있었다.
환자들 중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12살 여자아이 라가트는 접촉성 피부염과 두통, 설사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캐림은 설사를 심하게 하면 이곳에서는 항생제를 주로 처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생이 몹시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3살인 밀라키는 고열, 설사, 접촉성 피부염을 앓고 있어 찾아왔다. 아이들 환자는 이와 같이 대부분 설사, 고열, 피부염, 급성호흡기 질환 등을 앓고 있었다.
침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라크 환자들
진료를 받은 아이들은 뭐라도 건네주고 싶어서 꽃을 꺾어오기도 하고 일일이 답하기 힘들 정도로 한마디씩이라도 반갑게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진료한 환자의 거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전쟁의 상처는 아니었다. 보통 한국에서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환자가 대부분이었으며 다만 심한 질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또는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이 종종 찾아와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 했다. 이는 이미 전쟁 전에도 이라크의 의료가 어려웠고 현재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준혁씨와 정경진 회장이 펼친 한방진료도 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한의학의 침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침을 한번 맞고 나면 거의 완치가 된 듯한 몸짓과 표정을 보여줬다. 관절이 아프다던 환자도 금방 뛰기도 해 우리들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첫날 진료소에 대해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8시까지 해가 진 다음에도 진료를 해 80명이 넘는 환자들을 보았다. 진료소를 준비한 주민들이 서둘러 우리들을 돌아가도록 했다. 8시가 넘으면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생색내기 같아서 미안한 마음과 부담감이 함께 느껴졌다. 이들은 나의 진료 활동에도 그렇게 고마워하는데 나의 이 짧은 기간의 활동이 얼마나 이들 삶에 도움이 될지 부담이 됐다.
평가시간에 김정범 대표는 “환자들이 한국에서 진료하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좀 특이하게는 비타민 부족이나 회충, 리케치아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있었지만 전쟁과 관련된 환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 전쟁이 남긴 심리적, 정신적 충격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 진료를 할 때 의료체계가 붕괴된 것말고는 거의 한국 환자들하고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 것으로 생각됐다. 이준혁 선생도 “평소에 보건소에서 보던 환자 중에서 중풍을 뺀 환자들과 거의 같았습니다. 이라크에는 중풍이 별로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아마 교통수단이 없어 못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체중이 많이 나가 관절 질환이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평가회의 뒤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여러 단체 사람들과 이라크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취재 나온 문화방송팀, 정토회, 반전평화연대 사람들도 난민촌 및 빈민촌 조사 등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아침 피곤으로 좀 늦게 일어나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 한 채 진료소를 찾았다. 어제보다 더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고 자원봉사를 위해 진료소를 찾은 이라크 의사들도 늘어 라자크 같은 여의사를 비롯해 2명 정도가 더 왔다. 진료소는 더욱 활기찼다. 마침 그때 방문진료를 요청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안내인 하이다와 방문진료를 나서게 됐다. 첫 번째 집은 식구가 12명이었으며 두 할머니가 진료를 부탁했다. 당뇨와 고혈압이 심해 약을 먹어야 했던 73살의 할머니와 과거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적이 있으며 고혈압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 70살의 할머니를 진료했다. 그 둘은 한 남편을 둔 관계였다. 의사를 본 것이 신기했는지 믿음이 갔는지 잘 구별은 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식구 10명도 계속 자신의 증상을 설명했다. 하이다의 통역과 그들의 어설픈 영어, 나의 어설픈 이해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며 여러 약처방과 설명을 해줄 수 있었다.
스테로이드를 거의 영양제처럼
이웃집에서도 부르는 사람들이 계속 왔으며 이웃집에서는 몸무게가 거의 140㎏에 달하는 43살의 아주머니를 진료하게 됐다. 관절염,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이 있었고 전쟁 뒤로 약을 구하지 못해 약을 먹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약처방은 물론이고 운동처방 및 음식조절에 대해 30분이 넘게 충분히 이야기를 했지만 과연 그대로 할지 궁금했다.
현지 사람들에 따르면 이곳 여성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몸매 관리를 꽤나 열심히 하지만 결혼 뒤에는 거의 신경쓰지 않아 비만 여성이 많다고 했다. 이곳 결혼제도의 특징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에 대해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원 손정석씨는 “이곳 의사들이 쓰는 약이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데 특히 이곳 이라크에서는 스테로이드를 거의 영양제처럼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지적한 말이 생각났다. 이날 진료소 활동을 통해서도 거의 25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어제보다 훨씬 늘어난 환자로 특히 이준혁 선생, 정경진 선생 등 한의사들의 고생이 많았다.
바그다드는 아직도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전쟁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 시점이었지만 아직도 미군의 전차와 탱크가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다. 10년을 넘긴 전쟁 속에서 고통받던 이들, 후세인이 물러나고 스스로 일어나기 위한 활동이 앞으로의 과제인 것이다.
다행히 암마르, 캐림과 같은 사람들의 활동으로 이라크의 전쟁 뒤 복구활동은 활기를 찾고 있다. 우리의 활동이 이들이 다시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그다드= 김양중 의료전문기자/한겨레 사회부 himtrain@hani.co.kr

이라크 환자들을 진료하는 김양중 기자. 환자들 중에는 아이들이 가장 많았고, 질병이 있음에도 병원에 못가는 환자들이 너무 많았다.
간단한 출국 절차를 거치고 이라크 국경이 열리는 7시까지 1시간 반 정도 기다렸다. 이라크 국경에서는 미군이 통관 절차를 맡고 있었고 총과 탱크 등으로 무장한 그들을 보니 전쟁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왔다는 말 때문인지, 이라크 의료지원을 위한 의사라고 해서 그랬는지 쉽게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이라크 땅을 접어든 순간부터는 낯설은 사막 풍경이기도 했지만 전쟁의 상처를 안은 땅이라 생각돼 안타까움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라크로 안전하게 들어오기 위해서 요르단 암만에서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국경을 쉽게 통과하기 위해 기자증, 세계보건기구 인증서, 이라크 비자 등을 준비하는데 하필 이곳 아랍권이 금요일(9일)이 휴일이라 준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이라크 대사관의 업무가 제각각이어서 아예 비자 없이 들어가기로 결정한 터라 국경을 넘어선 다음부터는 내심 많이 불안했다. 한편 우리를 태워 운전한 팔랏은 바그다드 출신으로 미군이 폭격한 현장 곳곳을 설명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고속도로 중간에 끊어진 다리며 버스며 건물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미군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바그다드로 들어설 때는 굳이 도로 표지판이 길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격으로 인한 잔해가 점차 심해지는 곳으로 방향을 돌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도시 곳곳은 폭격과 화재로 불탄 흔적으로 황폐화돼 있었고 아직도 시내 곳곳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회원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알라비 아파트는 전쟁 중에도 폭격을 하나도 맞지 않았고 현재는 미군이 탱크와 무장군인으로 보호하고 있는 팔레스티나 호텔 뒤편에 있었다. 먼저 와 있었던 임연(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손정석(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원), 변혜진(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부장)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약품을 아파트 안으로 옮기고 첫날 회의를 시작했다. 이곳 사정을 대강 파악한 뒤 나름대로의 업무 분장을 하고 첫날 밤을 맞았다. 간혹 총성이 들렸으나(나중에 알고 보니 밤마다 40~50건 정도의 총기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바그다드의 첫날 밤은 고요하게 지나갔다. 설사가 심하면 항생제를 처방한다?

이라크 서포터들과 함께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의료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양중 기자.

미군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바그다드엔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다.

발가락이 잘려나간 어린이. 아이들은 맨발로 다녀 발에 상처가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