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그것이 국론통일이라 생각하던 이들이 모든 문제를 사회혼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분쇄되어야 할 ‘기억의 정치’라면, 너만큼은 나도 했으므로 나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 또한 사라져야 할 ‘기억의 정치’이리라.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시절 그 형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시위 주동으로 제적당한 모교 앞에서 사회과학 서점을 경영하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언제나 사람 좋은 눈웃음에, 평소 취급하지 않는 영어자습서나 수학참고서까지 값싸게 가져다주곤 하던 그가, 비좁은 서점에 항상 들끓던 그의 후배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남쪽으로 갔다는 소문과 함께 홀연 사라진 것은 1980년 5월의 일이었다. 나는 주인이 바뀐 그 서점 앞을 지날 때마다 그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지 않았기를 바랐다.
‘기억’은 정치적 행위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는 그 또래의 운동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고, 잊을 만할 때면 한번씩 우연한 장소에서 스쳐지나듯 만나기도 했다. 내가 동의 안 한들 별수야 없겠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이나 행로는 항상 내가 생각하는 대로는 아니었고 어느 순간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느 초겨울 새벽, 철야농성장에서 잠깐 나왔다며 좌경분자(?)로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해맑은 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현실 정치는 이상과 다르므로 내가 모르는 무슨 복잡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어보려 했다.
노무현 후보를 반대하면서 지난날 민주화투쟁의 성과를 송창식이나 양희은의 노래로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포퓰리즘을 비판한다는 그의 말을 전해들었을 때, 그리고 얼마 뒤 공교롭게도 그 양희은의 노래가 노 후보의 눈물과 오버랩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 나는 한편으로 그의 정치적 입장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죽은 자가 산 자를 붙들어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려웠다. 대통령의 여러 가지 실언 또는 적나라한 심경 표현이 문제가 되고 유행 주기가 끝난 것으로 보였던 386이라는 용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되는 요즘, 나는 문득 그 형의 얼굴과 함께 ‘기억의 정치’라는 말을, 그리고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똑같은 사건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면, 더구나 그것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 문제라면, ‘기억’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이고 과정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기억의 정치가 반드시 파시즘이나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의 행위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 기억에 맞추어 선택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현재와 미래의 행위가 어떤 것이든 과거의 기억에 합당하도록 해석될 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른다. 화물연대의 파업 또는 집단행위 때만 해도 나는 솔직히 말해 지입차주를 노동자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경제학적 논란거리에 더 관심이 있었을 뿐, 그들의 요구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물류대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이기적 행위를 일삼는 집단행동으로 말미암아 국기가 흔들리고 경제가 추락한다는 말이야 코흘리개 유신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이나 고위 정치인들의 친미적 발언에 대해서도, 그저 욱하는 심정에 촛불시위에 성조기나 찢는 것이 고작일 뿐 별다른 힘도 갖고 있지 못한 민초들이, 북핵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며 미국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에 관한 고급 정보를 두루 섭렵하고 있을 이들이 국제정치의 고차방정식을 푸는 데 훈수할 능력이 있겠는가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우리가 보듬어야 할 새로운 기억 그렇지만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논란에서 정보집중의 효율성이라든가, 프라이버시 보호의 한계라든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의 논의가 아니라, 전교조만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사람은 청와대에도 많다는 논박을 들으며 나는 얼핏 ‘기억의 정치’의 편린을 발견한다.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그것이 국론통일이고 안정이라 생각하던 이들이 모든 문제를 사회혼란으로 받아들이고 국가기강을 준엄하게 요구하는 것이 분쇄되어야 할 ‘기억의 정치’라면, 똑같은 논리로 너만큼은 나도 했으므로 나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 또한 사라져야 할 ‘기억의 정치’이리라. 중학생 시절의 사회과학 서점 한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허황된 낭만에 젖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지금 너와 내가 서 있는 자리야말로 우리가 보듬고 출발해야 할 새로운 ‘기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노무현 후보를 반대하면서 지난날 민주화투쟁의 성과를 송창식이나 양희은의 노래로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포퓰리즘을 비판한다는 그의 말을 전해들었을 때, 그리고 얼마 뒤 공교롭게도 그 양희은의 노래가 노 후보의 눈물과 오버랩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을 때, 나는 한편으로 그의 정치적 입장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죽은 자가 산 자를 붙들어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려웠다. 대통령의 여러 가지 실언 또는 적나라한 심경 표현이 문제가 되고 유행 주기가 끝난 것으로 보였던 386이라는 용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되는 요즘, 나는 문득 그 형의 얼굴과 함께 ‘기억의 정치’라는 말을, 그리고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똑같은 사건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면, 더구나 그것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 문제라면, ‘기억’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이고 과정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기억의 정치가 반드시 파시즘이나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의 행위 또한 궁극적으로는 그 기억에 맞추어 선택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현재와 미래의 행위가 어떤 것이든 과거의 기억에 합당하도록 해석될 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른다. 화물연대의 파업 또는 집단행위 때만 해도 나는 솔직히 말해 지입차주를 노동자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경제학적 논란거리에 더 관심이 있었을 뿐, 그들의 요구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물류대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이기적 행위를 일삼는 집단행동으로 말미암아 국기가 흔들리고 경제가 추락한다는 말이야 코흘리개 유신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이 아니었던가! 대통령이나 고위 정치인들의 친미적 발언에 대해서도, 그저 욱하는 심정에 촛불시위에 성조기나 찢는 것이 고작일 뿐 별다른 힘도 갖고 있지 못한 민초들이, 북핵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며 미국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에 관한 고급 정보를 두루 섭렵하고 있을 이들이 국제정치의 고차방정식을 푸는 데 훈수할 능력이 있겠는가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우리가 보듬어야 할 새로운 기억 그렇지만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논란에서 정보집중의 효율성이라든가, 프라이버시 보호의 한계라든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의 논의가 아니라, 전교조만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사람은 청와대에도 많다는 논박을 들으며 나는 얼핏 ‘기억의 정치’의 편린을 발견한다.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그것이 국론통일이고 안정이라 생각하던 이들이 모든 문제를 사회혼란으로 받아들이고 국가기강을 준엄하게 요구하는 것이 분쇄되어야 할 ‘기억의 정치’라면, 똑같은 논리로 너만큼은 나도 했으므로 나를 따라야 한다는 요구 또한 사라져야 할 ‘기억의 정치’이리라. 중학생 시절의 사회과학 서점 한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허황된 낭만에 젖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지금 너와 내가 서 있는 자리야말로 우리가 보듬고 출발해야 할 새로운 ‘기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