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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온몸으로 겪은 현대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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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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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에는 하늘이 노랬다.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아득함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겪어온 삶 또한 모질긴 했지만 이보다 더할 때는 없었다.

이중주(61)씨는 둘째아들 기정이의 감옥행 소식을 전해듣고는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이런 것을 두고 참담함이라고 했던가. 가슴이 푸들푸들 떨려 말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기정이 엄마’ 이중주씨는 그러나 쓰러져 있지만은 않았다. 아들 옥바라지에 그치지 않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으로서 아들 대신 부도덕한 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러는 동안 평범했던 어머니는 민주화 운동가로 변해갔다.

이씨는 사랑하는 아들의 구속 뒤에 겪은 곡절많은 인생유전을 이번에 책으로 묶어냈다. <재빽이들 귀딩이>(개마서원).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와 스스로 익힌 서툰 글솜씨로 대학노트 30여권에 삐뚤빼뚤 적은 일기를 출판사에서 다시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추천 글을 쓴 향린교회 홍근수 목사는 “한 개인의 체험으로 엮은 우리나라 현대사이자 증언집”이라고 평했다.

“그때 참 힘들었지요. 경찰들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고. 지금도 성한 데가 하나도 없어요.” 이젠 고향마을 가치레미(경기도 안성)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는 이씨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이씨는 본래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대에는 사방 40리를 남의 땅 밟지 않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하대요. 아버지 세대에도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 정도였어요.” 귀한 집안의 ‘귀딩이’는 부모를 일찍 여의면서 ‘천딩이’로 전락한다. 부모 대신 의지하고 살던 삼촌마저 ‘보도연맹 사건’으로 처형당하는 바람에 거친 세파에 내던져진다. 미용사, 화장품외판원 등 온갖 궂은 일로 전전하다 어찌어찌하여 결혼을 했지만 형편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어려운 살림에서 그나마 희망은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2남1녀)이었다. 특히 서울대에 입학한 둘째아들(이기정)은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그렇게 기대를 모았던 기정씨는 지난 85년 ‘민정당 중앙연수원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고 이를 계기로 어머니의 삶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민가협 회원으로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재판 과정에 항의하다 공무집행 방해, 법정 모독으로 구속되는 등 세 차례나 수감생활을 했다. 기정씨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됐으며 서울 중계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있다.

이중주씨에겐 조그마한 꿈이 하나 있다. 고향마을에 소외된 이들의 공동체 ‘사랑의 집’을 세우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은 60평짜리 큼지막한 조립식 주택을 지어놓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논, 밭도 좀 있고하니… 되지 않겠습니까.”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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