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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젠 ‘살인의 규명’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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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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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사건에 대해 치밀한 연구작업 벌이는 서구와 달리 1차 자료 공개도 제대로 안 돼

영화 <살인의 추억>의 흥행 대박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태세다. 진범이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생겨나고, 단체관람을 요청하는 곳도 잇따르고 있다.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거나 ‘재수사를 촉구하자’는 목소리도 터져나온다.

그러나 정작 ‘기억의 과잉사태’를 불러온 장본인 봉준호(34) 감독은 “기억을 복원해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5월7일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인데도 사건에 대한 전문적 분석과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살인광 잭’은 아예 관광상품으로


사진/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 가운데 두건의 범행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경찰에서 자백한 박아무개(30)씨. 그는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한겨레)
봉 감독이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결정적 계기는 영국 런던 방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1880년대 영국에 실존했던 연쇄살인범 ‘살인광 잭’(Jack The Ripper) 사건을 접한다. 한 남자가 런던 뒷골목에서 매춘 여성들만 골라 연쇄적으로 살해하면서 전 영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범인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영구미제사건으로 처리됐다. 당시 범인은 피해자들의 장기 일부를 시체에서 떼어낸 뒤 이를 말려 봉투에 넣고 누군가에게 보내면서 ‘지옥으로부터’(From Hell)라는 문구를 써넣은 것으로도 악명을 날렸다.

봉 감독이 놀란 것은 사건의 엽기성이 아니라 그 사건을 대하는 영국사회의 치밀함과 진지함, 포용력이었다.

“런던의 대형서점에 갔더니 한 코너가 아예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 논문, 소설, 만화 등으로 꽉 차 있더라고요. 영구미제사건에 대한 상상력과 해결 욕구가 그런 현상을 불러온 것 같았어요. 분석과 연구를 넘어 그 사건을 관광상품으로까지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는 경악했죠. 한밤중에 관광객들을 모은 뒤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데려가 여기가 1차 살인이 일어난 곳인데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우리와 문화가 완전히 다르죠. 1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도 다르지만요.”

봉 감독은 국내로 돌아와 6개월 동안 화성 사건에 대한 기초 자료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신문보도 내용과 관련자들의 증언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에 대한 전문적 분석과 평가를 다룬 본격적인 범죄보고서나 논문, 책은 구하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영화의 강점인 ‘80년대라는 시대의 공기를 재생해내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치밀함’은 주로 사건을 직접 담당하고 목격한 전직 경찰관들과 지역신문 기자들에게 상당히 기댈 수밖에 없었다고 봉 감독은 설명했다.

또 사건의 내용에 일차적으로 다가가는 기록보다는 오히려 여기서 파생된 연극(김광림 연출의 <날 보러와요>)이나 방송 프로그램(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이 도움이 많이 됐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범인의 시점에서 범행심리의 변화과정을 좇아가는 형식으로 쓰인 단편 추리소설(이수광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이 한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국회도서관에 한편의 석사학위 논문(‘소문의 구성과 상상의 유통: 화성군 연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문희, 1999)이 소장돼 있지만, 이마저 범죄학적 측면에서 분석된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 “공시시효 끝나지 않았다”

사진/ 1990년11월16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병점5리 삼성석재공장 뒤 야산에서 여중생 김미정양이 목졸려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연합)
그러나 17년이나 지난 연쇄살인사건과 관련한 1차 자료가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사건이 미친 충격으로 보면 ‘무관심’에 가까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독점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필연적인 사회현상인 지능적 ‘연쇄살인범’(serial killer) 현상이 이 땅에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역사적 의미에 비춰볼 때도 이 사건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 전문가들과 현장을 지켜본 수사관계자, 언론인들에게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인기가 더 높아지면 그 영향 때문에 거꾸로 사건에 대한 1차적 연구활동이 활발해질 가능성도 있다.

범죄 전문가들은 이 같은 ‘직접 연구’의 결핍과 관련해 우리 사회의 제도나 여건이 개별 범죄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측면이 크다고 지적한다.

한림대 심리학과 조은경 교수는 “범죄와 관련한 자료는 공적인 자료인데도 1차기록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수사기관이나 교정기관에서 전혀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나 범죄자에 대한 직접 자료나 정보를 수집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범죄에 대한 ‘반추’나 ‘반성’이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다. 그는 또 “사회적으로는 범죄사건에 관심이 무척 높은 데 비해 그것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외국에서 유행하는 범죄 다큐멘터리 소설(True Crime Story)과 같은 장르조차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범죄학자들은 “그나마 정확하지 않은 통계자료를 부여잡고 범죄의 흐름과 경향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분석하는 데 연구의 초점을 맞춘다”는 다소 억울한 비판을 받은 지 오래다. 개별 살인사건에 대한 현미경적 연구가 부족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수사기록 등 사건에 관한 1차적 기록의 공개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성 사건의 경우는 모두 10건의 사건 가운데 아직 2건이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수사 관련 정보·기록의 공개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봉 감독은 이 사건이 여태껏 미제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범인과 시대의 갭(gap)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시대는 그만큼 나아가지 않았는데 범인은 시대를 한 발짝 앞서가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사건현장에서 나온 범인의 정액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할 방법이 없어 외국기관에 감식을 의뢰하고 그 결과가 나오기만을 목빠지게 기다렸다거나, 마구잡이로 데려온 용의자에 맞춰 형사들이 현장증거를 조작하는 장면 등은 이에 대한 극적인 표현이다.

‘살인을 위한 살인’이 늘어가는 현실

사진/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봉준호 감독은 “기억을 복원해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고 고백한다.(연합)
2003년 한국은 봉 감독이 말한 “시대와 범인의 ‘갭’”을 상당 부분 없앤 사회다. 과학수사의 급속한 발달이 이를 입증한다. 요즘 강력사건의 참고인을 만나러 가는 형사들은 경찰서에서 쏴주는 관련 인물들의 사진영상을 휴대폰으로 받아 확인한다. 외국의 사례와 국내의 경험을 기반으로 과학수사 기법을 시스템화하고 제도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서울지방경찰청 범죄분석관 권일용 경사는 “몇달이 지난 물에 젖은 범죄자의 지문을 복원해내거나 범인이 사용한 일부 언어만을 활용해 범죄자를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과학수사 기법은 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살인의 추억>이 곱씹었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대구 지하철 사고 당시 초기 현장보존에 실패한 사실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연쇄살인자 백과사전>을 쓴 마이클 뉴튼은 전 세계 1600여건의 연쇄살인사건을 분석하면서 이 가운데 미제사건 비율이 20%를 넘는다는 사실과 함께 “거의 모든 미국의 대도시가 현재 연쇄살인사건을 한건 이상씩 안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경고는 멀지 않은 한국사회의 미래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살인을 위한 살인’이 늘어나는 최근의 범죄경향을 보면 더욱 그렇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교훈’으로 남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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