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정신질환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교묘하게 위장된 형태의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적절한 ‘치료 환경’에 대한 범사회적 지원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 인권 보호의 강조는 공허할 따름이다.
지난달 말 방송위원회는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와 관련해 방화용의자의 ‘장애’에 초점을 맞춘 방송사 보도는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해당 방송사들은 앞으로 인권이 최대한 보호되도록 취재보도시 표현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권고했다.
이 소식을 듣고 김 계장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전에 근무했던 한 정신병원 원무과 직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날 그는 여느 아빠들처럼 딸아이 손을 붙잡고 투표소로 향했다. 별 생각 없이 투표인 명부를 확인하던 그는 자기 이름이 빠져 있음을 알고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범죄자’로 선거권이 박탈된 주민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서야 까맣게 잊고 있던 3년 전 악몽을 되살려냈다.
무산된 정신병원내 부재자 투표
민주주의 선거가 무엇인지 딸아이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을 ‘딸딸이’ 아빠의 작은 소망이 좌절되고 만 사연은 어처구니없게도 단지 ‘부재자 투표’와 ‘거소자 투표’의 차이를 몰랐다는 것뿐이었다. 정신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는 환자들도 선거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을 떠올려본 사람이 있기나 할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획기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신병원 내 투표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 없이 살 사람’이 ‘선거방해죄’라는 중범죄자의 오명까지 덮어쓰게 되었다. 부재자 투표는 병원 내에 투표소가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김 계장이 안 것은 불과 투표 3일 전이었다. 부재자는 거주지 인근 행정기관 등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 단, 함정이나 영내 거주 군인과 경찰,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부재자 신고서 작성시 거소투표를 신청하면 투표소에 직접 나가지 않고 자신의 거주지에서 투표해 우편으로 발송할 수 있다. 김 계장은 부랴부랴 환자 가족들에게 신분증 등을 병원으로 가져와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걸었지만 환자의 도주 등을 염려하는 가족들의 반응은 입에 담기 거북할 정도로 냉담했다. 물론 망연자실해져 즉시 환자 개인에게 상황을 통보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잘못은 문구로만 따지면 선거법 위반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의도했던 애초 취지로 볼 때 선거를 방해할 무슨 ‘범의’(犯意)가 있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최초로 시도된 정신병원 내 투표에 어떠한 관심과 노력도 보이지 않은 국가와 사회가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 ‘정신질환 환자들의 선거를 고의적으로 방해하지 않았겠느냐’는 혐의는 과연 ‘정신병원은 그렇고 그런 곳’이라는 사회 일반의 선입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입증된 것인지 의문이다. 겉으로 정신질환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교묘하게 위장된 형태의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적절한 ‘치료 환경’에 대한 범사회적 지원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 인권 보호의 강조는 공허할 따름이다. 깊어만 가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 예전에는 가족이 견디다 못해 정신병원을 찾았으나 요즘에는 이웃들이 진정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는 가족들의 호소가 부쩍 늘었다. 산업화가 진행돼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정신질환자도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살았던 우리 농촌 사회의 전통은 자취를 감추었다. 안타깝게도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정신보건법’이 제정되는 등 선구적인 정신의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욱 깊어져만 간다는 인상이다. 가족이나 환자 스스로도 그런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직도 정신병원에서 환자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 환자와 가족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병원을 찾는 사례가 오히려 일반적이라고 할 정도다. 도식적으로 갑상선 호르몬의 과잉 또는 부족으로 갑상선 질환이 나타나듯 정신질환도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같은 물질의 과잉 또는 부족으로부터 비롯되는 병일 뿐이다. 갑상선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도 치유될 수 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데카르트의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환자들이 영화나 미디어에 등장하는 정신병 환자와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은, 가상의 인물은 ‘뿔 달린 북한주민’처럼 사회적 편견의 투사(投射)로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해와 편견이라는 망령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가족들을 탓할 수 없으며, 같은 이치로 김 계장의 비운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장호균 | 신경정신과 전문의

사진/ 장호균 신경정신과 전문의
민주주의 선거가 무엇인지 딸아이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을 ‘딸딸이’ 아빠의 작은 소망이 좌절되고 만 사연은 어처구니없게도 단지 ‘부재자 투표’와 ‘거소자 투표’의 차이를 몰랐다는 것뿐이었다. 정신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는 환자들도 선거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을 떠올려본 사람이 있기나 할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획기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신병원 내 투표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 없이 살 사람’이 ‘선거방해죄’라는 중범죄자의 오명까지 덮어쓰게 되었다. 부재자 투표는 병원 내에 투표소가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김 계장이 안 것은 불과 투표 3일 전이었다. 부재자는 거주지 인근 행정기관 등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 단, 함정이나 영내 거주 군인과 경찰,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부재자 신고서 작성시 거소투표를 신청하면 투표소에 직접 나가지 않고 자신의 거주지에서 투표해 우편으로 발송할 수 있다. 김 계장은 부랴부랴 환자 가족들에게 신분증 등을 병원으로 가져와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걸었지만 환자의 도주 등을 염려하는 가족들의 반응은 입에 담기 거북할 정도로 냉담했다. 물론 망연자실해져 즉시 환자 개인에게 상황을 통보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잘못은 문구로만 따지면 선거법 위반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의도했던 애초 취지로 볼 때 선거를 방해할 무슨 ‘범의’(犯意)가 있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 최초로 시도된 정신병원 내 투표에 어떠한 관심과 노력도 보이지 않은 국가와 사회가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 ‘정신질환 환자들의 선거를 고의적으로 방해하지 않았겠느냐’는 혐의는 과연 ‘정신병원은 그렇고 그런 곳’이라는 사회 일반의 선입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입증된 것인지 의문이다. 겉으로 정신질환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교묘하게 위장된 형태의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적절한 ‘치료 환경’에 대한 범사회적 지원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 인권 보호의 강조는 공허할 따름이다. 깊어만 가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 예전에는 가족이 견디다 못해 정신병원을 찾았으나 요즘에는 이웃들이 진정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는 가족들의 호소가 부쩍 늘었다. 산업화가 진행돼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정신질환자도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살았던 우리 농촌 사회의 전통은 자취를 감추었다. 안타깝게도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정신보건법’이 제정되는 등 선구적인 정신의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욱 깊어져만 간다는 인상이다. 가족이나 환자 스스로도 그런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직도 정신병원에서 환자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 환자와 가족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병원을 찾는 사례가 오히려 일반적이라고 할 정도다. 도식적으로 갑상선 호르몬의 과잉 또는 부족으로 갑상선 질환이 나타나듯 정신질환도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같은 물질의 과잉 또는 부족으로부터 비롯되는 병일 뿐이다. 갑상선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도 치유될 수 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데카르트의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환자들이 영화나 미디어에 등장하는 정신병 환자와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은, 가상의 인물은 ‘뿔 달린 북한주민’처럼 사회적 편견의 투사(投射)로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해와 편견이라는 망령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가족들을 탓할 수 없으며, 같은 이치로 김 계장의 비운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장호균 | 신경정신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