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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 혁] 민주노총에서 대부업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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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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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노동자와 결혼한 조직부장 한혁씨, 〈한겨레21〉여성독자를 향해 공개구혼을 하다

나에게 아마추어무선(HAM)이라는 취미가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아주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방구석에서 헤드폰을 끼고 앉아, 세계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짓이 내가 하는 일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차에 달린 아마추어 무선안테나를 알아보는 노동운동가가 딱 한 사람 있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 민주노총 마크가 선명한 투쟁복을 입은 사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몇개의 단어만으로 나는 그가 아마추어 무선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5월1일 노동절 집회에 참석한 한혁씨. 일주일 내내 민주노총 서울 본부에서 먹고 자는 그다.(김진수 기자)

고등학교 때부터 싹이 보이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부장 한혁(34)씨를 이번에 만나기로 한 이유는 바로 그 동류의식 때문이다. 그는 “5월1일 노동절에 임시 무선국을 열어 전 세계 노동자들과 교신하고,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 사진이 담긴 QSL 카드를 보내고, 8·15통일축전 때는 북의 HAM과 기념교신을 해보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다. 그 ‘아무에게도 얘기해보지 못한 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금세 각별한 사이가 됐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한혁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다. “그 사람 민주노총하고 결혼한 사람입니다. 토요일 딱 하루만 집에 가고 일주일 내내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먹고 자는데,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교육실에서 책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녹음기와 수첩을 꺼내들다가 한혁씨와 나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이거 꼭 조사받는 분위기네.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아본 경험은 있지” “그럼요. 저 이번에 사면복권됐습니다.”

한혁씨의 부모님은 본래 지방 중소도시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전국체전이 열리면서 오래된 기와집을 멋진 건물로 개축해야 한다는 시청의 지시를 따랐다가 송사에 말려드는 바람에 완전히 가세가 기울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자식 공부는 시켜야 한다’며 서울로 올라왔어요. 무척 어렵게 살았지요. 겨울에 난방을 못 해서 방 안 주전자의 보리차가 얼 정도였으니까요. 이모와 이모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때부터 이종사촌 형제들과 우리 남매가 모두 한 집에 살았어요. 제가 고3 때는 네명이 모두 고등학생이어서 어머니가 아침에 도시락을 8개나 싸야 했어요.”

사춘기에 접어들어 한껏 예민해진 그의 눈에 비뚤어진 우리의 교육현실이 잡히기 시작했다. 학교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중·고등학생이 1년에 100명이 넘는다고 할 때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회적 타살에 동조하는 것이다, 그런 고민이 되더라고요. 혼자 고민하면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헌책방에서 <전태일 평전>을 찾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선생님 한분을 만났다. “그 선생님이 광주항쟁 자료집을 빌려주셨어요. 학교 도서관 뒤에 가서 혼자 그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막 울었어요. <현대인과 소외> <말콤엑스>도 그때 읽었지요. 사회시간에 ‘임금이 인상되면 물가가 인상된다’고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왜 거짓을 가르치냐?’고 대들었더니 친구들이 ‘시험에 안 나오는 문제는 쉬는 시간에 물어보면 안 되냐?’고 나무라더군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혼자 유인물을 만들어 학내에 뿌렸다. 자판기 수입금을 공정하게 사용하자, 학생복지를 위해 쓰여야 할 돈이 다른 곳에 흘러들어가고 있다, 학내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A4 종이 한쪽에 빽빽이 적어 300장을 만들었다. 혼자 새벽에 학교에 들어가 교실 게시판마다 붙이고 학생들 책상 속에 집어넣었다.

운전기사 뽑는 줄 알고 민주노총 들어와

한혁씨(김진수 기자)
“선생님이 내 가방을 뒤져서 두 번째 유인물의 초안을 찾아냈어요. 그때 정말 뒈지게 맞았어요. 어머니가 불려오셨는데 교감 선생님이 ‘가난하게 자란 애들이 대학교 들어가면 화염병 던지고 그런다’고 하는 거예요. 잘못했다고 빌고 있다가 그 말 들으니까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끝까지 싸우겠다’고 박박 대들었더니 오히려 처분을 근신으로 낮추더군요.”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대학에 갈 거냐 아니면 노동현장에 들어갈 거냐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만, ‘철학’이 그를 붙들었다. “녹두에서 나온 <세계철학사>를 읽었어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과에서 문과로 바꾸고 재수를 했지요. 1년 동안 학력고사 점수를 80점쯤 높여서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가 다닌 대학은 이른바 명문이지만 ‘학벌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운동권 학생”으로서 독일 교과서를 갖고 세미나를 하다가 동독이 망하는 모습을 봤다. “독일 놈들은 관념적이라 안 된다니까….” 다시 소련 교과서를 갖고 세미나를 하는데 소비에트가 해체됐다. 부모님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 생각하고 11학기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1997년, 박석운씨가 운영하는 노동정책연구소에 기자로 들어가 2년1개월 동안 일했다. “취재한답시고 돌아다니면서 많이 보고 배웠지만, 주변부에서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99년에 그만뒀는데 선배한테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사람 뽑는다’는 연락이 왔어요. ‘차를 곧 살 예정인데 운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 정도라면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었지요. 처음에는 정말 운전기사 뽑는 줄 알고 왔다니까요.”

말이 멋있어서 ‘조직부장’이지 온갖 힘든 일을 다 해야 하는 직책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사무실 형광등 고치는 일부터 신규 노조를 조직하고 투쟁을 지원하는 일까지가 모두 그의 몫이다. 민주노총에 들어와 처음 맡았던 싸움이 바로 ‘현대중기’ 사건이었다. “저하고 나이 차이가 20년 이상 나는 선배님들이었어요. 나이 쉰 넘은 분들이 450일간의 파업투쟁을 끝내면서 한결같이 ‘정말 소중한 것을 얻었다. 세상 보는 눈이 바뀌었다. 50년 넘게 갖고 있던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우리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앞서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고생하는구나 깨달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 노동운동의 희망이 느껴져요.”

그가 해주는 그런 이야기들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명동성당에서 한국통신 정규직 파업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어요. 밤에 사무실에 혼자 돌아와서 민주노총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는데 ‘이랜드 노조도 민주노총 노조입니다. 한국통신 투쟁하는 데 갔더니 우리는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다 와 있더군요’라는 글을 이랜드 조합원이 올렸어요. 그 글 읽는데 막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지도부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갖고 있는 여러 한계들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민주노총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반성했습니다.”

‘꼬라지’ 걱정한 어머니의 500만원

그 싸움의 한 귀퉁이에 나도 가끔은 있었다는 것으로 위로 삼으며 그의 얘기를 계속 들었다. “서울지방노동청을 점거해야겠다는 연락만 달랑 받고 방배역으로 혼자 갔어요. 재능교사노조 조합원들이 ‘민주노총에서 사람이 왔다’고 우르르 몰려오는 거예요. 아무 경험도 없는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잖아요. 300여명과 함께 노동청으로 들어갔지요. 지도부가 와서 교섭하는 동안 우리는 복도에 앉아 농성을 하고 있는데, 무척 덥더라고요. 굉장히 추운 날이었어요. 너무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이렇게 따뜻한 곳에 앉아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바람에 노동자들이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며 싸움을 해야 하는구나…, 그때 재능교육 농성장에는 회사가 전기까지 다 끊어버렸거든요.”

이야기의 방향을 그의 요즘 생활로 돌렸다. 그가 매일 잔다는 숙직실도 둘러봤다. 알뜰하게 박봉을 모아 ‘무이자 대부업’을 한다는 소문의 실체에 대해서도 물었다.

“돈을 쓸 시간이 없으니까 통장에 조금 모인 것뿐이에요. 사무실에서 급히 돈이 필요할 때 제 통장에서 꺼내쓰기도 하지요. 졸업할 때 어머니가 ‘너 사는 꼬라지 보니까 앞으로도 험한 일하며 살 것이 분명한데, 엄마가 마지막으로 해주는 것’이라면서 500만원을 주셨어요. 그 돈이 바탕이 된 거예요.”

그의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놈 하나 잘 키워놨다가 천만 노동자한테 빼앗겼다”고 말씀하실 만큼 그를 이해해주시는 분이다. 여러 형제들 중에 맏이였던 그가 뭘 하나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부모님은 “동생들 놔두고 너 혼자만 가질 거냐. 항상 너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생각을 하면서 살아라.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많이 배워서 남에게 줘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치셨다. 한혁씨는 그 가르침이 자기 운동의 출발이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공개구혼을 해보는 것이 어때? 기사 제목에 ‘공개구혼’이라고 넣어달라고 부탁할까?” 내 말에 그가 갑자기 꾸벅 큰절을 하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면 아깝게, 왜 저 같은 놈을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지면이 아까운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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