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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팔순 할머니의 ‘따뜻한 덜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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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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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이 넘으년 가슴속에 소설보따리를 묻어두고 산다. 김성순(83) 할머니는 최근 <덜렁이>(HWB 펴냄)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펴내 그동안 쌓인 인생얘기를 풀어헤쳤다. 파란만장하지도 않고 특별하달 것도 없지만 따뜻함이 가득 담긴 이야기들이 소설보다 감동적이고 재미있다.

황해도 안악 태생으로 평양여고를 중퇴한 김씨는 6·25 땐 인천에서 살았고, 1·4후퇴 때 목포로 내려가 10년을 살다가 5·16 때 서울로 올라와 40년 이상 중구 오장동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할머니. 김씨가 팔십 넘어 별안간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어느 날 찾아온 저시력증 때문이었다. 김씨는 67살 때 영아시설에서 아기 돌보는 봉사를 시작한 이래 사랑의 전화, YWCA 등에서 상담원으로 활동했다. 아동복지시설 여학생들에게 바느질도 가르쳤고, 장애아복지시설에서 14년 넘게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저시력증 탓에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낙담한 그에게 셋째 아들이 뭐든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며칠 동안 궁리하던 김씨는 “그래 쓰자. 쓸 수 있는 만큼 써보자”고 다짐하며 한줄 한줄 써내려 갔다. 눈은 침침했고, 손목도 저려왔지만 무엇보다 한번 쓴 글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중엔 딸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를 그대로 받아적었다.

복슬강아지 때부터 7년을 키우던 영리한 진돗개 덜렁이가 좁은 집에서 하루 종일 묶인 채 용변도 참으며 지내는 게 안타까워 뜰이 넓은 집으로 떠나보내고 온 식구가 저녁을 굶은 사연, 59년을 동반자로 함께 지낸 남편이 약혼 시절 둘만이 간직한 비밀얘기를 기억하며 영원이 잠들던 순간, 아홉살 때 아버지가 18원 주고 들여놓은 싱거재봉틀이 손재봉틀로, 다시 모터를 단 재봉틀로 변신하면서도 아직까지 분신처럼 남아 있는 이야기 등등. 김씨는 “못 보면 쓰자는 생각에서 책을 썼으니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라며 ‘늙은이의 넋두리’로 치부해달라고 말하지만 <덜렁이>를 읽다보면 배시시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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