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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두운 기억은 되풀이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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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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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강재훈 기자
오랜만에 어두운 기억 하나를 떠올려본다.

한겨레신문사에 몸담기 전인 1985년, 한 일간지 수습기자로 행정기관을 출입하며 기자생활이 뭔지를 배울 때 일이다. 당시 이 행정기관에 대해 국가안전기획부가 보안검열을 실시하려 했고, 며칠 뒤 있을 검열에 대비해 직원들이 서류를 소각하는 등 소동이 빚어졌다. 이런 상황을 1단짜리 가십기사로 다루었다. 그날 저녁, 신문사 앞에는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섰고, 편집국 간부들이 안기부 관계자들을 ‘정중하게’ 맞았다. 안기부 보안검열 자체가 국가기밀인데 이를 보도했으니 기자를 데리고 가 조사를 해야겠다는 게 안기부쪽 설명이었다.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뒤 승용차는 사라졌고, 선배들은 한동안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선배들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술집으로 데려가 어깨를 다독거리면서 밤샘 통음을 했다. 새내기 기자에게 이 일은 “국가정보기관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나”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

국가정보원이 뉴스의 중심이 되고 있다. 고영구 원장 내정자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마무리되면서, 곧 모습을 드러낼 국정원 개혁안 때문이다.

국정원 직원의 기관·단체 출입금지, 수사권 남용 견제, 물갈이 인사와 인력 재배치, 예산통제 강화 등이 현재 검토되는 개혁안의 주요 뼈대인 것 같다(<한겨레21> 455호 참조).

국민을 위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에는 미흡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패를 두번이나 바꾸었는데도 왜 인권침해의 상징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는 것 같다. 국정원 개혁의 요체는 수사권이다. 어떤 그림을 그려도 수사권 폐지 없이는 개혁이 요원하다. ‘국정원=고문수사’라는 이미지를 국민 기억 속에서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0년 10월부터 2년간 활동한 뒤 펴낸 1차 보고서에는 그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위원회가 다룬 83건의 사건 가운데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피진정기관인 사건이 15건에 이른다. 피진정기관을 ‘불특정’으로 했지만, 두 기관이 관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사건도 17건에 이른다. 최종길 서울대 교수,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장석구씨 정도가 원혼을 달랬을 뿐이다.

모두 국정원이 수사권을 갖고 있어 비롯된 사건들이다. 그런데도 개혁안이 ‘국민의 정부’ 이후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하지 않았고, 대공수사가 국정원의 전문영역임을 앞세워 수사권을 그대로 두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으니 걱정이 앞선다.


정보와 수사를 분리하는 추세에 따라 이제 지구상에서 3~4개국의 정보기관만이 갖고 있다는 수사권. 그 나라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우리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돼!”라는 탄식을 내뱉을 것이다. 국정원이 정보를 가공해 수사로 연결짓고, 수사권을 앞세워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한, 정보가 ‘국력’이 되는 길은 험난할 뿐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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