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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석유만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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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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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침공 전쟁은 4월9일 바그다드 중심가의 사담 후세인 동상이 미군의 기중기에 의해 철거됨으로써 사실 끝이 났다. 더 이상의 민간인 희생을 막게 됐으니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바그다드 시민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박수로 미군을 환영하는 모습은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사진/ 한겨레 임종진 기자
약탈과 방화는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시적 현상일 뿐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걱정이 앞서는 것은 곧 미 군정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괜한 걱정일지 모르겠으나 이라크에 앞서 한국 땅에 상륙한 미 군정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에서 미 군정이 친일파나 친미주의자들과 손잡고 나라의 정기를 어지럽힌 것은 되돌릴 수 없는 가장 아픈 역사다. 한국전쟁 참전과 분단상황은 미군으로 하여금 올해로 50년째 수도 서울 한복판인 용산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게 했다. 혼혈아와 기지촌, 부대찌개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이 되었고, 저속한 양키문화는 고유의 민족문화를 좀먹었다. 바그다드의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껌과 초콜릿을 얻어먹기 위해 미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빡빡머리 소년이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아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효순·미선양을 추모하며 다시 미국을 생각하기까지 역시 50년이 걸렸다.

정치인들과 사진 찍으러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이라크 파병반대 여론이 거센데도 국익 운운하며 파병을 결정하는 것을 보며 미국의 ‘보이지 않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한다.

군정으로 시작된 미국과 한국과의 질긴 인연이 반세기를 훨씬 넘겼다. 그 ‘어두운 그림자’에서 미국은 물론 이라크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라크에서의 미 군정도 어쩌면 한국만큼이나 길고 어두워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전운동가 밀란 레이는 2002년 8월 자신이 쓴 <전쟁에 반대한다>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10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어떤 명분에도 전쟁은 불법이다’, ‘미·영군 수뇌부도 반전을 외치고 있다’ 등 7가지는 이미 전쟁이 일어난 터라 휴짓조각이 돼버렸다. 그러나 나머지 3가지는 미 군정에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①진정한 체제 변화가 아니라 또 다른 후세인을 낳을 뿐이다. ②중동이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인이 아니라 부시다. ③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그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지 지켜볼 일이다.

“제발 이라크에서는 석유만 가져가라. 나머지 모든 것은 이라크 국민의 몫으로 남겨달라.” 미국에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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