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는 전쟁, 대형 참사와 재앙,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늘 주변을 맴돌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국전쟁과 광주학살이 그랬고,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서 대량실업 또한 가공할 위협이었다.
걸프전 때부터 전쟁 실황이 스포츠 경기처럼 중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이라크전 ‘실황 중계’를 보는 심정이 걸프전 때와 사뭇 다른 것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강 건너 불이 다음엔 북한 핵문제로 번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왜 ‘전쟁 반대·파병 찬성’일까
이라크전 관련 여론조사에서 ‘전쟁 반대, 파병 찬성’인 국민이 ‘전쟁 반대, 파병 반대’ 또는 ‘전쟁 찬성, 파병 찬성’인 국민보다 많았다. ‘전쟁 반대, 파병 찬성’이란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입장을 국가 이기주의나 친미 보수적 성향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는 한반도 긴장상태에 대한 현실적 위기의식과 반세기 전 한국전쟁 경험으로부터 국민 정서가 자유롭지 못한 데서 비롯된 듯싶다. ‘전쟁 반대, 파병 찬성’ 입장은 단지 국익을 우선시하는 이중적 태도만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한 우리가 전쟁이라는 현실적 위협에 대한 ‘심리적 타협’의 산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칫 파병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억지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지 우리 국민, 아니 보편적 인간의 전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필사적인 회피 노력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지난 세기 한국전쟁과 광주학살이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와 한을 남겼는지, 얼마나 잔혹하고 폭넓게 개인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는지 비인간적 전쟁의 속성을 새삼 고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지독한 비극이다. 그런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웃음짓는 이라크 어린이의 모습은 현실적 생존의 위협을 능가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전쟁과 재앙에 직면한 인간의 역동적 ‘감정적 적응력’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싶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은 알 것이다. 광주학살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나 노래가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거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짓눌려 지내던 시절을…. 지금 와서 “그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나타나는 사건의 재경험, 생존자 죄의식과 비슷한 감정적 생존을 위한 적응 과정이었구나”라고 다시 생각해보려 하지만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우리 현대사는 전쟁, 대형 참사와 재앙,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늘 주변을 맴돌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전쟁과 광주학살이 그랬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서 대량실업 또한 많은 가정을 일시에 파괴할 수 있을 만큼의 가공할 위협이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재, 최근의 대구지하철 참사에 이르기까지 대형 참극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와 교통사고, 드러나지 않은 가정폭력까지 포함한다면 현대사를 통해 우리 국민이 감당해야 했던 정신사회적 스트레스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나마 진료현장의 환자들 가운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적 형태를 흔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짐작하건대 우리 문화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한’(恨)이나 ‘화병’과 같은 현상이 비극적 현대사의 개인적 적응과정과 연관되지 않을까, 또는 민족이라는 공동체 문화 속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어 개인의 정서적 안녕상태가 유지돼온 것은 아닐까 싶다. 한반도 평화, 적극적 대처를 비극적 현대사와 우리 국민의 역동성을 대비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국민 통합과 연대의식이 왜 중요한지를 주장하고 싶어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통해 나름대로 사회현상을 재해석해봤다. 물론 국민 정서를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시각과 한반도 전쟁 방지를 위한 국가의 국제정치적 대처는 분명 다르다. 아쉬운 것은 북한 핵문제 관련논의에서 ‘이라크전이 장기화돼야 우리가 산다’는 소극적 입장 외에 적극적 대책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부터 미국 보수세력 사이에서는 ‘이라크전이 끝나면 다음은 북한’이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대책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참여정부가 강조한 독자적인 한반도 평화정책 추진은 불가능한 것인가. 북한 핵문제에 부딪혀 있으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의외로 무관심한 우리 사회 분위기는 베트남 참전 병사의 ‘감정 마비상태’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장호균/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라크전 관련 여론조사에서 ‘전쟁 반대, 파병 찬성’인 국민이 ‘전쟁 반대, 파병 반대’ 또는 ‘전쟁 찬성, 파병 찬성’인 국민보다 많았다. ‘전쟁 반대, 파병 찬성’이란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입장을 국가 이기주의나 친미 보수적 성향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는 한반도 긴장상태에 대한 현실적 위기의식과 반세기 전 한국전쟁 경험으로부터 국민 정서가 자유롭지 못한 데서 비롯된 듯싶다. ‘전쟁 반대, 파병 찬성’ 입장은 단지 국익을 우선시하는 이중적 태도만이 아니라 전쟁을 경험한 우리가 전쟁이라는 현실적 위협에 대한 ‘심리적 타협’의 산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칫 파병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억지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지 우리 국민, 아니 보편적 인간의 전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필사적인 회피 노력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지난 세기 한국전쟁과 광주학살이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와 한을 남겼는지, 얼마나 잔혹하고 폭넓게 개인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는지 비인간적 전쟁의 속성을 새삼 고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지독한 비극이다. 그런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웃음짓는 이라크 어린이의 모습은 현실적 생존의 위협을 능가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전쟁과 재앙에 직면한 인간의 역동적 ‘감정적 적응력’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싶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은 알 것이다. 광주학살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나 노래가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거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짓눌려 지내던 시절을…. 지금 와서 “그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나타나는 사건의 재경험, 생존자 죄의식과 비슷한 감정적 생존을 위한 적응 과정이었구나”라고 다시 생각해보려 하지만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우리 현대사는 전쟁, 대형 참사와 재앙,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늘 주변을 맴돌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전쟁과 광주학살이 그랬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서 대량실업 또한 많은 가정을 일시에 파괴할 수 있을 만큼의 가공할 위협이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재, 최근의 대구지하철 참사에 이르기까지 대형 참극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와 교통사고, 드러나지 않은 가정폭력까지 포함한다면 현대사를 통해 우리 국민이 감당해야 했던 정신사회적 스트레스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나마 진료현장의 환자들 가운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적 형태를 흔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짐작하건대 우리 문화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한’(恨)이나 ‘화병’과 같은 현상이 비극적 현대사의 개인적 적응과정과 연관되지 않을까, 또는 민족이라는 공동체 문화 속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어 개인의 정서적 안녕상태가 유지돼온 것은 아닐까 싶다. 한반도 평화, 적극적 대처를 비극적 현대사와 우리 국민의 역동성을 대비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국민 통합과 연대의식이 왜 중요한지를 주장하고 싶어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통해 나름대로 사회현상을 재해석해봤다. 물론 국민 정서를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시각과 한반도 전쟁 방지를 위한 국가의 국제정치적 대처는 분명 다르다. 아쉬운 것은 북한 핵문제 관련논의에서 ‘이라크전이 장기화돼야 우리가 산다’는 소극적 입장 외에 적극적 대책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부터 미국 보수세력 사이에서는 ‘이라크전이 끝나면 다음은 북한’이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대책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참여정부가 강조한 독자적인 한반도 평화정책 추진은 불가능한 것인가. 북한 핵문제에 부딪혀 있으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의외로 무관심한 우리 사회 분위기는 베트남 참전 병사의 ‘감정 마비상태’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장호균/ 신경정신과 전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