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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김용금] “노조 경험은 아름다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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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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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에 만났던 간호사 김용금씨가 외국 간호사 자격취득을 준비중인 이유

안중초등학교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용금(40) 선생에게 전화를 하니 “후문쪽에서 기다리면 곧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후문에 서서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김용금씨가 나한테 전화를 하더니 “지금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는다. 서로 한참 동안 지형지물을 설명하는데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언뜻 머리를 스치는 순간, 김용금씨가 “혹시, 지금 경기도 평택시 안중면에 있는 안중초등학교에 가 계신 것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전화기 저쪽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이를 어째. 제가 있는 곳은 충남 안면도에 있는 안중초등학교예요.”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하늘이 핑 돌았다. 교육 정책 담당자들에게 부탁하노니, 똑같은 학교 이름 좀 제발 짓지 마시라.

하종강

아뿔싸! 평택에서 안면도까지

부랴부랴 차를 돌려 남쪽으로 달리는 동안, 10여년 전 일들이 고속도로 가로등처럼 차례차례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강서병원이 노동조합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1991년 무렵에 김용금씨를 처음 립뎬? 노조 위원장과 사무국장만 몇번 만나다가 상임집행위원회 간부들을 처음 만나던 날, 위원장을 따라 들어간 병원 근처 식당 뒷방에서, 이충희 위원장이 그날 조합원들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우리는 지금 노동조합 설립 이래 가장 큰 시련에 부닥친 것인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병원이 부위원장님에게 행한 부당한 조치는 노동조합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겠다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떡장수 할머니와 호랑이의 이야기를 동지 여러분들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호랑이의 말을 차례로 듣다가 떡장수 할머니가 끝내는 어떻게 되고 말았는지 잘 아실 거예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물러선다면, 우리 노동조합도 마침내 그 떡장수 할머니 꼴이 되고 말거예요. 오늘은 그동안 여러분이 만나고 싶어했던 하 선생님도 오셨으니까….”

어느 재치 있는 여성이 재빠르게 위원장의 말을 잘랐다. “생각보다 미남이네요. 결혼하셨어요”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잡고 방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구르는 흉내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이 아마 김진숙 부위원장 생일이었지…. 소점자 법규부장은 내 이야기가 다 끝난 뒤 “너무 감상적이다”라고 말했지…. 두 시간쯤 지난 뒤, 위원장이 “하 선생님이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셔야 한다니까, 보내드려야겠지요”라고 외치자, 구석 자리에 앉아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어주던 한 여성이 “싫어요”라고 크게 외치기도 했지….

강서병원 노동자들의 대화 속에서는 “우리 교선부장님”이란 말이 유난히 자주 나왔는데, 그 교선부장이 바로 김용금씨였다. 얼마 뒤, 강서병원 노동자들은 밤샘농성을 시작했고, 1년 조금 넘는 짧은 세월 동안 그 사람들은 소설책 몇권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온갖 일들을 겪었다.

정말 오랜만에 김용금씨를 만나 간호사가 된 이유를 물었다. 사람을 알게 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묻다니…. “고등학교 3학년이 막 될 무렵,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나한테는 참 중요한 시기였는데…. 병환으로 고생하는 아버님과 식구들 모습을 보면서 간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천안국제방직에 야간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취업했지요. 9개월 일하면서 돈을 모아 1년 뒤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4남2녀 중 내가 넷째였는데, 우리 정말 고생 많이 하면서 자랐어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한결같이 어린 시절이 불우한가. 도대체 왜…” 하는 생각으로 가슴 한 구석이 시려왔다.

간호사는 천직이었다

간호대학에서 학보사 편집장과 과 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뒤, 취업한 첫 직장이 바로 강서병원이다. “가자마자 수술실로 배치됐어요. 수술실 일이 힘들긴 하지만 보람이 있어요. 응급수술 환자가 오면 그 때부터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그 뒤에도 나는 응급실, 수술실, 중환자실에서만 일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런 힘든 일에 맞는 적성을 갖고 태어났나 봐. 호호….”

김용금씨는 웃었지만, 듣고 있는 나는 사춘기 시절 일기장 한 귀퉁이에 적어 넣었던, “나는 불행한 인간일까 아마 나는 불행한 인간일 것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르면서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운명이 불행할 거라는 예감은 보통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잠깐 스쳐가는 생각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인생을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어찌 보면 간호사라는 직업이 김용금씨에게는 정말 천직인지도 모른다.

강서병원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90년이었다. 노동조합과 병원의 마찰이 시작되면서부터 원장은 아예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동네 작은 의원급으로부터 시작해 종합병원이 되기까지 키워온 자신의 병원에 노동조합이 생기는 꼴을 차마 두고 볼 수 없다는 격이었다. 중소규모 병원 경영자가 노동조합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는 대부분 그 때문이다. 자신이 일생을 걸고 키워온 병원에 노동조합이 생겨 ‘분탕질을 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는 직원들은 이 부서 저 부서로 마구 이동되었다. 노동조합 파괴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다는 사람이 병원 관리자로 채용되더니 전에 없던 폭행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의사가 퇴직을 해도 새 의사를 채용하지 않았고, 입원 환자 수가 줄었다는 핑계로 병동 수가 하나씩 줄더니 급기야 폐업을 했다.

“이틀 휴무하고 출근한 92년 2월28일 출근했는데, 병원이 문을 닫은 거예요. 원장은 매년 의사 고액 납세자 순위 1, 2등을 다투던 사람이었는데, 경영이 어려워졌다고 병원 문을 닫았어요. 노동조합 꼴은 차마 못 보겠다는 거지요.”

강서병원 노동자들은 그 뒤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김용금씨만 해도 한양대병원, 서울간호병원, 도영병원, 길병원을 거쳤고 초등학교 기간제 보건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뒤에도 신현북·효성서·대정·역곡 초등학교를 거쳐 지금 안중초등학교에서 보건교사로 일하고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서 보건실로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어요. 대부분 어려운 집안 아이들이지요.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그 아이의 젊은 시절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보내도록 하는 데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기간제 교사라 전교조에 가입할 수 없지만, 가끔 행사에 따라가서 거들기도 하지요. ‘양호교사’가 ‘보건교사’로 바뀌는 싸움 과정에 나는 머릿수 하나 보탤 자격도 없다는 게 서러웠어요. 그렇지만 앞으로 잘해낼 거에요. 잠 못 자면서 콘크리트 바닥에서 철야농성했던 경험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어느 시인이 그랬지요. 짐이 무거워 투정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짐 때문에 내가 바르게 살고 있더라고…. 노동조합 경험은 내 인생에 그런 의미를 갖고 있어요.”

나는 왜 휴대폰을 없애버렸나

김용금씨는 지금 휴대폰이 없다. 연락하려면 아주 힘이 든다. 휴대폰을 없애버린 이유를 물었다. “전화는 많이 오는데, 기다리는 사람 전화가 안 와서요….” 세상에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김용금씨가 그 사람을 기다린 세월은 벌써 17년째다. 간호대 학생 시절 실습 나갔던 병원에서 만난 사람과 아직도 줄기찬 연애를 지속하고 있고, 그 긴 세월 동안 두 사람 마음이 흔들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니,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사랑의 긴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따로 또 한 권의 소설이 필요하다.

김용금씨는 지금 외국 간호사 자격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할머니 간호사도 새로 취업할 수 있더군요. 여기에서는 내 나이만 되도 벌써 간호사로 취업하기 힘들어요. 외국 간호사 자격을 따면 환갑이 지나도 외국에 가서 간호사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막히는 고속도로를 피해 굽이굽이 국도와 지방도로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는 밤길에서, 나는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된 내가 할머니 간호사 김용금씨에게 진료를 받는 모습이 떠올라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그 때도 우리는 만나서 말하겠지.

“문래동 칼국수집 기억 나 비 내리던 날, 여럿이 가서 칼국수를 먹고, 비빔국수를 후식으로 나누어 먹었지. 강서병원 사람들이 우리집에 사 들고 왔던 인삼벤자민은 수십 년을 잘 자라 지금은 고목이 되었어. 그때 우리 참 젊었지….”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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