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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성자가 되어버린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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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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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으로만 포장되는 틱 낫 한… ‘마음의 평화’는 파란만장하고 치열한 삶에서 나온 것

지난 3월22일 오후 흔히 세계 평화의 상징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방한을 기념해 서울 시청앞에서 반전행사가 열렸다. 시청앞 행사에 30여분 늦게 도착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여전히 자동차들이 지나고 있었고, 한 귀퉁이에 어림잡아 3천여명의 사람들만 단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취재를 나온 각종 대중매체 기자들과 행사 관련단체 회원·직원을 빼면 일반시민은 절반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그 자리에는 단체로 무리지어 나온 불자들도 없었고, 우리 시대 실천적 양심을 대변하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붉은악마 등으로 예전과 사뭇 다른 대중집회의 물꼬를 튼 1020세대 대열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리 걸음 명상?

사진/ 서울 시청 앞 반전행사에 참석한 틱 낫 한 스님. 취재를 나온 기자들과 행사 관련 단체회원·직원을 빼면 일반시민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물론, 그 자리에는 남녀노소와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뭔가 빠진 듯한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많다는 타이(Thay-베트남어로 스승·선생이라는 뜻으로 우리말의 스님으로 보면 된다)의 독자들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날 행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걷기 명상’(walking meditation)은 하나의 패션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중들의 참여가 불가능한 이날의 걷기 명상은 타이와 제자들이 인파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타고온 버스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여러 가지 사정상 ‘제자리걸음’을 통해 걷기 명상에 동참()하라는 사회자의 고심섞인 발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이날 행사의 상황은 현재 일고 있는 한국의 타이붐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겉모습만 요란한 채 알맹이는 빠져버린 이른바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오직 판매고를 높일 생각에 타이를 소녀 취향의 음유 시인 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산방한담(山房閑談)을 일삼는 수필가로 포장하기에 바쁜 사람들 덕에 타이의 출가수행자, 즉 비구(比丘)로서의 정체성은 훼손되고 말았다. 정체성의 희석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이른바 의도적 물타기는 스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타이에게 각종 현란한 직명(職名)을 붙이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타이가 말하는 평화나 행복은 치열한 수행 끝에 얻은, 즉 현실 속에 구현된 절대적 의미의 그것임에도 앞서 말한 이들은 그것을 세속적 행복의 기술로 둔갑시켜버렸다. 이렇게 치환의 수사학, 명명(命名)의 정치학을 통해 타이는 어느덧 서점가에서 인기를 끄는 미국식 처세와 성공 강사의 한 사람 정도로 인식되고 만 것이다.

지난 여름 프랑스 플럼빌리지에서 타이를 인터뷰할 때였다. 어느 기자가 베트남전 당시 분신한 스님들의 행위에 대해 생명을 경시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닌가 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타이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단호하게 그것은 ‘진실을 알릴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희생’이라고 응답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성자가 돼버린 투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차후 접하게 된 여러 자료를 통해 그때 언뜻 얻은 이미지가 구체화되다가 마침내 확연히 자리잡은 것이다.

남·북 베트남 정권으로부터 배척당하다

사진/ 그를 수필가로 포장하기에 바쁜 사람들 덕에 비구(比丘)로서의 정체성은 훼손되고 있다.

올해 77살인 타이는 1942년에 불가에 입문했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베트남 독립전쟁을 맞게 된다. 그때 이미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된 타이는 당시 베트남에서도 일종의 산중불교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불교가 산을 내려가 대중 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돕지 않으면 참된 불교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를 주창하기에 이른다. 1966년엔 뜻을 같이하는 일단의 제자들을 받아들여 상즉종((相卽宗·the Order of Interbeing)을 설립하고는 구체적 실천의 발판을 마련한다. 타이는 베트남의 응옥 딘 디엠(고 딘 디엠) 독재정권이 종교의 자유를 말살하려는 정책에 항거하는 운동을 통해 현실참여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우리가 가끔 화면에서 볼 수 있는 베트남 스님들의 분신은 바로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것이다.

타이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1년에 잠시 고국을 떠나 펠로십 장학금으로 미국 프린스턴대에 유학하여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자리잡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타이는 전쟁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저버릴 수 없어 마침내 2년간의 미국생활을 뒤로 한 채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다. 이 무렵 이미 남베트남 정권은 타이의 책을 금서로 지목해 책을 가지고 있어도 현장에서 체포했다. 타이의 화두 ‘평화’는 공산주의자의 표식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타이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몇개의 학교와 조직을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동포의 삶을 재건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누비게 된다. 그러다 전쟁이 더욱 심화하자 타이는 1966년 종전(終戰)을 설득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나 ‘남과 북을 막론하고 즉각적인 폭격의 중단’을 비롯한 5개 항목의 평화제안서를 발표했는데, 북베트남 정권은 이를 무척 못마땅해했다.

이제 타이는 남과 북 어느 정권에도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타이는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홍콩까지 왔다가 제자인 짠 콩을 우여곡절 끝에 만난다. 그로부터 베트남의 진상을 알게 된 타이는 짠 콩과 유럽을 거점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베트남전의 종식과 고아를 비롯한 전쟁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

마음의 평화는 곧 현실의 평화

1975년 마침내 전쟁은 끝났지만, 세계 각지에서 베트남으로 보내는 각종 구호물자는 필요한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기 힘들었다. 그러나 타이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쟁 피해자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룬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트피플 구호가 가장 커다란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타이와 짠 콩은 때로는 난민들에게 돈을 갈취했다는 혐의를 받는 상황에까지 몰리면서도 망망대해를 헤매다 죽어가는 동포, 아니 인간들을 결코 모른 체 할 수 없어 끝까지 최선을 다한 끝에 1979년 미국이 난민 수용 한도를 10만명으로 늘리게 하는 대성과를 거둔다. 그 뒤 프랑스에 망명해서 정착한 뒤 플럼빌리지를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타이가 말하는 ‘마음의 평화’는 그의 파란만장하고 치열한 삶이 보여주듯 깊은 산골에서 얻은 관념적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는 현실의 평화와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타이는 산중을 박차고 나와 속세로 뛰어든 것이다. 끊임없이 중생을 위한 투사의 길을 걸어온 끝에 수행을 완성해 성자와 다름없는 경지에 든 것이고 마침내 ‘소요(逍遙)하는 평화’가 된 것이다.

진현종/ 불교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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