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베트남
등록 : 2003-03-27 00:00 수정 :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3월20일을 ‘유엔과 국제사회 모두에 슬픈 날’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슬픔이 두 차례 더 이어집니다. 21일 임시국무회의는 기다렸다는 듯 공병대와 의료병 파견을 결의합니다. 여야 지도부는 의원들의 조리 있는 반대가 있음에도 역시 기다렸다는 듯 파병동의안 처리에 합의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온갖 분석과 전망의 언설이 무의미합니다. <알자지라>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는 전쟁의 진실은 100 대 1의 전비로 무장한 전쟁광의 일방적 침략전쟁입니다. 사막 가운데 점점이 있는 주요 도시를 사방팔방에서 무차별로 폭격하는 대량살상극입니다. 도시는 불타고 아이의 머리통이 터지고 멀쩡한 사람의 팔다리가 절단됩니다.
정밀한 무기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은 얄팍한 선전술입니다. 물론 최첨단무기를 실전에서 마음껏 실험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재래식 폭탄의 재고를 처리하는 데 바쁩니다. 무기를 너무 많이 먹어 소화불량에 걸린 거대한 전쟁로봇이, 마침내 배설할 곳을 찾아 밑으로 싸고 위로 게워내는 듯합니다.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전혀 새로운 전쟁이라지만, 전장의 모습은 미국이 치러온 명분 없는 전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대량살상을 ‘부수적 피해’로 수반하는 침략전쟁입니다.
특히 30여년 전 치른 베트남 전쟁과 비슷합니다. 미국은 “베트콩은 없다, 따라서 사방에 있다”며 2차 대전 때의 두배나 되는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베트콩의 비밀루트이자 은신처인 밀림에 집중된 폭격이 인구 500만명의 도시에 집중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습관화된 폭격’은 언제부터인가 서구인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힌 비서구인에 대한 경멸감, 곧 백인우월주의가 낳은 야만이라는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분석을 곱씹어보게 합니다.
미국이 선악의 심판자이자 응징자로 행세하며 사실은 패권을 추구한다는 점도 같습니다. 패권 추구는 앞뒤 가리지 않는 절대권 추구로 대담해졌습니다. 그러나 무력으로 목적을 온전히 달성한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미국은 급기야 거센 반전의 역풍에 직면해 있습니다.
반전 평화운동의 파고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제어하는 실질적 힘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도 국회도 새 흐름을 타지 못하고 음지로 숨어들었습니다. 파병이 더욱 슬픈 것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도 잘못을 되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은 베트남전 파병으로 몇푼의 실리를 얻었지만 숱한 생명을 대가로 바쳤습니다. 무엇보다 씻을 수 없는 침략의 오욕을 남겼습니다.
비록 전투병 파견은 아니지만 잘못의 전철을 너무 쉽게 밟았습니다. 그것도 베트남에 뒤늦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시점입니다. 우리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은 사람들과 적이 되려고 한다면, 한국은 지난 30년 동안 국제사회 일원으로 나아진 것이 무엇인가 자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