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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피묻은 국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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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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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지지함으로써만 가능한 ‘피묻은 국익’은 어떤 종류의 국익일까. 그렇게 얻어낸 비참한 평화는 얼마나 얼마나 견고할 것인가 국제깡패가 된 미국에 의존해 유지될 한반도 평화는 허구가 아닐 수 없다.

사진/ (박승화 기자)
온 세계가 그토록 간절한 목소리로 말렸건만, ‘내가 설정한 악은 내가 박멸하고야 말겠다’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의 놀랍고도 무서운 신앙심이 끝내 이라크 침공으로 드러나고야 말았다. 한 택시기사는 “지금 조지 부시가 이라크를 조지고 부수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의 신앙심은 증오와 탐욕의 신앙심이다. 그의 세계관은 미국예외주의에 바탕하고 있고, 그의 소망은 군사주의에 바탕한 제국의 실현이다. 같은 종파에서는 칭송할지 모르지만, 이번 침공의 의미에 전율하는 사람에게 ‘3월20일’은 절망과 비탄의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조지 부시가 조지고 부순 것

개전을 선포한 첫날, 외신은 그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는 자상한 소식마저 전했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은 ‘세계구원’의 이름으로 수백만명의 학살을 명령한 뒤, 그가 깊은 수면에 들었다고 전하는 세계는 언설로 표현 불가능한 부조리 자체다. 전황은 새 무기의 소개와 함께 흥분과 열기 속에서 전 세계에 24시간 중계되기 시작했으며, 파괴 범위와 함께 주가·유가 소식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걸프전 때처럼 이번 침공도 스포츠 중계와 비슷하게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에 없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유인원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배타적 기질과 서로 쌈질하는 모습은 모든 고릴라·침팬지·오랑우탄에게 나타나지만, 그 공격적 전투가 동족살해에까지 이르는 건 ‘인간’뿐이라고 한다. 홍적세 인간의 두개골에서도 얻어맞은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생겨먹기를 그렇다 해도 정말 큰일났다. 조지 부시가 ‘조지고 부순’ 것이 이라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조진’ 것은 ‘정당한 전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믿음에서 나온 평화의 목소리였다. 그가 ‘부순’ 것은 반전과 비전(非戰)을 호소하면서 지키려고 한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생명가치와 정의, 또는 평화 실현을 위한 인류의 오래된 소망을 그는 일거에 조롱했다. 1차 대전 이후 간신히 탄생한 국제연맹이 파시즘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은 그 호전성과 파괴력에서 전무후무한 신제국주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국제질서의 마지막 이성적 보루인 유엔마저 이제 유명무실해졌고, 그 구실이 무망해진 일이다. 이번 폭격으로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과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마키아벨리즘이 횡행하게 되었다.


참으로 여러 질문을 하게 된다. 잘 훈련된 병사들을 살육장으로 내몰고, 죽음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항전의 깃발을 올리게 하는 ‘국가’란 무엇이고, 위대한() 권위의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국가에, 어리석음의 극치인 전쟁터로 달려가라고 명령할 권리는 누가 부여했을까 왜 우리는 국가의 명령에 늘 복종해야만 할까 개인의 도덕적 자율과 국가의 정당한 권위는 일치할 수 없을까 이 오래된 질문은 여전히 불온한 질문일까

파병 결정은 너무 쉬웠다

그러므로 미국의 줄기찬 호전성만큼 중요한 일은 우리의 운명이고, 파병을 결정한 우리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왜 우리가 그에게 허락한 국가 권위를 이토록 쉽사리 남용하는지 알 수 없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복종을 얻어낼 능력’이라고 하자. 우리가 그에게 ‘국가나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어떤 힘의 대리자’로서 정부를 맡겼을 때는 파병과 같은 특별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정당성과 합법성 또한 거느리기를 소망했다. 그 대가로 ‘우리 군대’가 그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전 세계가 격렬하게 규탄하는 미국의 테러리즘에 전화 한 통화로 바로 동조했고, 너무 쉽게 파병결정을 했다. 전화까지 걸어준 미국의 예우()에 황송해하면서. 지혜로운 평화외교를 기대했지만, 그의 급한 현실주의는 그에게 부여한 권위를 의심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반전시위를 ‘시민의식의 성숙’이라고 후하게 평가하는 정부 스스로 미성숙의 자가당착을 범하고 말았다. 파병을 반대하는 일부 ‘개혁적 국회의원들’이라는 말과 함께 정부의 ‘개혁성’은 영양가를 잃고 말았다. 학살을 지지함으로써만 가능한 ‘피묻은 국익’은 어떤 종류의 국익일까. 그렇게 얻어낸 비참한 평화는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얼마나 견고할 것인가 이미 국제깡패가 된 미국에 의존해 유지될 한반도 평화는 허구가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슬픈 일은 이라크전의 비극만큼이나 우리가 ‘신념에서 비롯된 국가 권위의 복종심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파병은 절대 안 된다.

최성각/ 소설가·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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