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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종덕] “전태일은 내가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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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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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여사의 구속에 죽음을 결단했던 민종덕씨, 노동상·문학상 등 우직하게 기념사업 추진

운명의 여신은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어두운 길모퉁이에 숨어 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람을 낚아채어 또 다른 운명으로 끌고들어간다. 1974년 어느 날, 민종덕(51)씨는 늘상 들르던 헌 책방에서 무심코 집어든 낡아빠진 월간지를 읽다가 ‘운명의 여신’의 날카로운 발톱에 걸렸다.

“헌 잡지에서 우연히 전태일 기사를 읽은 거야. ‘노동자가 분신했다’는 사실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그때서야 오래전 신문에서 어렴풋이 기사를 읽은 기억도 나고…. ‘이 사람의 죽음을 사람들이 없던 일로 그냥 지나쳐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기사에 나와 있는 도봉구 쌍문동의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이소선 어머니를 처음 만났지. ‘나 이 글 읽고 감동받았다. 이 뜻을 계속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얘기를 처음 만난 어머니에게 했어.”

나는 ‘도원결의’처럼 영화나 소설의 비장한 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니까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던가요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엄청나게 의심하시지.” 우하하…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소선 여사에게 엄청난 의심을 받다


“누구 소개를 통해 온 것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당연히 의심하지. 내가 ‘어디어디서 일을 하고 있다’고 얘기해주니까 그때 노조간부인 이승철씨한테 나를 한번 지켜보라고 한 것 같애. 그렇게 한참 살펴보고 나서 ‘끄나풀은 아니다’ 판단했나봐.”

강증산의 고향, 정읍의 ‘손바래기’라고 ‘시루봉’이 있는 동네에서 태어난 민종덕씨가 서울로 올라온 계기는 여느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60년대 말에 도열병이 싹 쓸어버려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됐지. 5남2녀 모두 7남매였는데, 시골에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생각하고 모두 서울로 올라와 삼양동에서 살았어. 방 두칸을 얻어 8명이 살았지. 시골에서 중학교 다니다가 그만두고 왔으니까, 처음에는 공부하고 싶어 이곳저곳 많이 알아보다 고등공민학교에 혼자 찾아가 접수하고 열심히 다녔어.”

그가 헌 책방을 유난히 자주 들락거린 것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니 ‘청계피복노조’와 운명적으로 만난 것도 어찌보면 그 열망 때문이다. 그 무렵 많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그랬다.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을 찾았다.

이소선 어머니와 양승조씨가 중심이 되어 청계피복노조의 전투성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됐을 때 민종덕씨도 그 활동에 참여했다.

“‘전태일 열사 추도식을 묘에 가서 제사만 지내는 식으로 하는 것은 진정한 추도식이 아니다, 추도식을 노동현장·노동교실에서 해야 한다’며 집행부 반대를 무릅쓰고 그런 일들을 추진했지. 그때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생각하면 참 섭섭했다고 말해. 인간관계로는 다 친구 사이고 그랬으니까….”

집중적으로 권력의 탄압이 시작되던 77년에 총무부장으로 청계피복노조 살림을 맡았다.

“탄압이라는 것이 옛날에는 집행부만 조지면 됐는데, 밑에서 계속 사람들이 올라와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니까, 쟤네들도 ‘힘이 어디에서 나오나’ 알아봤겠지.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 공부하는 곳, 그 중심이 이소선 어머니와 노동교실이니까 여기를 쳐야겠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고 노동교실을 봉쇄한 거야.”

민종덕씨가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던 무렵부터 노동교실투쟁·시간단축투쟁·임금인상투쟁 등에 관한 이야기는 인터넷 ‘전태일기념사업회’ 사이트 ‘70민노회’의 ‘민종덕 이야기마당’에 자세히 올라와 있다. 가장 중요한 그때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글들을 참고하면 된다”고 그냥 넘어가려기에 가장 인상에 남는 한 대목만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3층서 투신했으나 살아남다

“죽음을 결단한 적이 있었지.. 77년에 노동교실 빼앗겼을 때…. 그때는 진짜 죽으려고 했어. 우리가 사실 그동안 이소선 어머니한테 많이 기대서 싸웠잖아. 박정희 때도 쟤네들이 어머니가 밉기는 했지만 함부로 탄압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는데, 그 어머니를 구속시켜버렸단 말이야. 우리가 배우고 공부하고 연대하는 해방공간·보금자리인 노동교실을 우리에게서 앗아갔단 말이야. 그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고. 적어도 내가 전태일 열사의 뜻을 좇아 뭘 해보겠다는 사람인데, 내가 노조간부로 있을 때 어머니 빼앗기고 노동교실 빼앗기고…. 니들이 어머니를 구속시켰다면 그만한 정치적 부담을 가져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때 엄청난 조직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 몸을 던져 싸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어. 우리가 힘이 없다고 자꾸 다른 데 의지해서 싸울 게 아니다, 이제 당사자가 결단을 해야 할 때다, 죽기로 싸우자, 그렇게 된 거야.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죽어야겠다 생각하고 선언문도 ‘결사선언’이라고 해놓고 투쟁한 거야. 근 한달 가까이 쟤네들이 노동교실을 봉쇄했는데, 사람들을 조직해서 뚫고 들어갔지. ‘경찰이 들어오면 뛰어내리겠다’고 했지만 얘들이 주저하지 않고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3층에서 뛰어내렸지. 그때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죽었을 텐데, 이상하게 엉덩이부터 땅에 떨어진 거야.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고 다른 사람 다 구속될 때 나 혼자만 안 된 거지.”

자칫 잘못하면 민종덕씨를 이렇게 살아서 만나지 못할 뻔했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 우리도 사람을 차별하는 그런 기준이 있다. ‘남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져본 적이 있는 사람’과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선출직 사무장으로 80년 노조 강제 해산조치, ‘아프리 농성’을 겪은 민종덕씨는 ‘구속될 사람 다 구속되고 수배될 사람 다 수배된’ 엄혹한 상황에서 사람들과 모여 계속 지하에서 활동했다. 유화국면을 맞아 활동가들이 다시 수면 위에 올라와 84년에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면서 위원장을 맡았다.

“노조가 산산조각 난파선이 되었잖아. 사람들이 그 조각을 끌어모아 수리를 했는데, 내가 나이도 많고 노조 경험도 있다고 위원장을 맡으라고 한 거야. 전태일 열사 친구 세대가 아닌 첫 세대가 노조 집행부를 맡은 거지. ‘서노련’ 만들면서 사람들이 날더러 또 ‘서노련’ 위원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나는 청계노조 위원장을 그만두고 황만호가 맡았지. ‘서노련’ 하자마자 85년 9월에 바로 구속됐지. 징역 2년 살고 87년 6월항쟁 뒤 나왔을 때는 김영대가 위원장을 하고 있었어.”

거두절미하고, 오늘의 ‘전태일기념관’이 이나마 모습을 갖춘 것도 모두 민종덕씨 덕이다.

전태일과 문학이 연결 안 된다고

“82년엔가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 일 실무를 맡았지. 문익환 목사님이 회장이었고 나는 직책이 간사인가 그랬어. 노조 강제해산 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추도식을 할래도 뭔가 이름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가족 주최’ 이렇게 할 수는 없잖아. 쟤네들의 탄압 예봉을 피하기 위해 건물을 짓기 위한 위원회라는 뜻으로 기념관건립위원회를 만들었고, 사회선교협의회 사무실에 책상 하나 빌려 일을 봤지. 그때 출판되자마자 판금된 <전태일 평전>을 뿌리고 다니며 판매하는 일을 많이 했어. 그러다 노조가 생기고 건물이 생기니까 85년쯤인가 건립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기념사업회로 바꾸면서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은 거지.”

‘전태일노동상’과 ‘전태일문학상’도 그가 없었다면 아예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전태일문학상은 88년에 내가 얘기를 꺼냈는데 비판들이 많았지. 전태일하고 문학하고 잘 연결이 안 된다는 거야. 그렇게 얘기들이 되면서 ‘전태일노동상’도 같이 생각하게 된 거지.”

민종덕씨는 아직까지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이름 아래 ‘전태일기념관’ 한귀퉁이에서 우리가 만나 ‘전태일문학상’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모두 그의 덕이다. 자기 혼자만의 공은 절대 아니라고 겸손하게 강조하지만, 민종덕씨가 없었다면 오늘의 전태일기념사업회·전태일기념관·전태일문학상·전태일노동상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나에게 와서 따져도 좋다.

글/ 하종강(한울노동자문제연구소장)
사진/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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