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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3중학살 사슬을 끓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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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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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가족들의 절규… 무기한 농성 별이며 통합 특별법 제정 촉구

사진/ 정맹근(사진 가운데)씨 등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인권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박승화 기자)
“내 나이 여섯살이던 1949년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덧 환갑이 됐지만, 아직도 그날의 어렴풋한 기억이 가슴을 헤집는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아픔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게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정맹근(60)씨의 고향 경남 산청군 시천면은 우리 현대사의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48년 여순사건의 주역인 14연대 병력 일부가 지리산으로 쫓겨 들어오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밤이면 ‘산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왔고, 낮이면 토벌군이 주민을 찾아왔다.

1949년 7월18일 지리산 중산리 자락에는 총성이 난무했다. ‘반란군’ 토벌에 나선 군경이 매복에 걸려 전멸당한 뒤, 군당국은 주민들을 인근 학교로 불러모았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청장년 30여명이 집단 사살됐다. 마을에는 불길이 치솟아올랐고, 더러는 겁에 질린 채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불에 타 숨졌다.


지리산 중산리 자락에 난무한 총성

사진/ 지난해 11월7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집회에서 슬픈 표정으로 앉아 있는 유가족들. (한겨레 이정용 기자)

그로부터 5일 뒤 군당국은 “반란군에게 밥을 주거나 짐을 날라다준 부역자는 자수하라”고 명했다. 마을 이장이던 정씨 아버지는 ‘자수’한 주민을 데리고 인근 덕산초등학교로 찾아갔다. 하지만 군인·경찰 가족을 제외한 70여명의 주민은 전선으로 묶인 채 학교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정씨는 “당시 그곳에는 3연대 2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주검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도 위치를 알고 있지만, 도로가 나버려 유해 발굴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8살에 결혼해 29살 되던 해 남편을 잃은 정씨 어머니는 아들 3형제와 시부모를 모시고 한많은 반백년을 버텨왔다.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던 정씨는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의 속옷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팔순 노모는 요즘 “내가 죽거든 관 속에 네 아버지 속옷을 함께 넣어달라”는 말을 부쩍 자주한다고 했다.

“민간인은 소와 같다. 이쪽으로 끌면 이쪽에서 풀 뜯고, 저쪽으로 끌면 저쪽에서 풀을 뜯을 수밖에 없다.” 극단의 시대를 버텨낸 이들은 생존본능에 충실한 채 짐승처럼 삶을 지탱해야 했다. 눈앞에 들이댄 총구에 이끌려 토벌대 길잡이가 되기도 하고, 반란군의 짐꾼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숨진 110만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영혼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구천을 떠돌고 있다.

지난해 12월24일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추모비 하나가 세워졌다. 꼭 53년 전 이날 마을에 찾아든 ‘죽음의 악귀’에 희생된 넋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당시 13살 초등학생이던 채의진(67)씨는 “주월산 정상 부근 어딘가에 ‘공비’가 숨어 있다는 정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점촌과 용궁(예천군)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2개 소대가 마을로 들이닥쳤다. 동네사람들은 겁에 질려 집 안에 있으면서 군인들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무작정 총질을 해대고 집에 불을 질렀다. ‘국군이 왔는데도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여긴 빨갱이 동네가 틀림없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고 말한다.

채씨는 참혹한 아비규환의 학살현장에서 형과 사촌동생의 주검 밑에 깔려 기적적으로 화를 면했다. 당시 참극으로 채씨의 할머니와 어머니, 형 명진(당시 29살)씨 부부와 누나 명분(당시 20살)씨, 숙모와 사촌 누나·동생 등 일가족 9명이 죽었다. 채씨는 “당시 24가구 127명이 살던 마을에서 이날 하루 동안 86명이 학살됐다”고 말했다. 학살된 이들 가운데는 돌도 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 5명도 포함돼 있다. 12살 이하 어린이가 26명, 65살 이상 노인이 10명 희생됐고, 여성이 절반이었다.

53년 만에 세운 추모비… 오랜 침묵의 세월

사진/ 민간인 학살의 공소시효는 없다. 유가족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국가인권위에 나붙은 벽보. (김종수 기자)

집과 가족을 잃고 외갓집에 몸을 의탁해 살던 그 무렵, 채씨의 아버지는 자주 정신을 놓았다. 밤잠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명진아, 명진아’ 큰아들 이름을 부르며 사건현장까지 눈밭 십릿길을 내달렸다. 한 마을 주민 3분의 2가 학살되자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은 직접 현지를 방문해 사건 무마에 나섰다.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단장 둘이 보직해임됐다. 그럼에도 숨진 이들의 제적등본에는 아직도 “공비 출몰 총격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관할경찰서장이 보고했다”고 적혀있다.

채씨는 “4·19혁명 뒤 진상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국회차원에서 조사도 벌였다. 1960년 국회 민·참의원 합동회의는 ‘문경 양민학살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그러다 5·16쿠데타가 터졌다.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한 것을 두고 빨갱이라고 몰아붙였다”고 말했다. 채씨는 몸을 피했지만, 당시 반국가행위 포고령 18호 위반으로 그의 친조카와 매형이 경찰에 붙잡혀 두달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숱하게 저질러진 학살의 참극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사건을 비롯해 거창 양민학살사건, 제주 4·3항쟁 등이 역사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구미왜관교 폭파사건, 경북 문경 석달마을 사건, 전남 함평사건, 경기 고양 금정굴 사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건이 문서자료와 피해자·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 차원의 반성노력은 걸음마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2002년 8월29일 출범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genocide.or.kr)는 2월27일부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2001년 9월 김원웅 의원 등 국회의원 47명의 발의로 제출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이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으로 올해 하반기부터는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16대 국회가 종료되면 특별법안도 자동폐기돼 특별법 제정운동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누가 공소시효 만료를 말하는가

사진/ 지난해 12월24일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달마을에 세운 어린이 학살 피해자 추모비. (범국민위원회 제공)

지난해 범국민위원회가 펴낸 <2002년 민간인 학살총서>에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의 국가는 피학살자들을 세번 죽인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전쟁을 전후해 저질러진 학살이 첫 번째라면, 1960년대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유가족들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해 1980년까지 연좌제로 묶어 탄압한 것이 세 번째다. 김 교수는 “이런 사실을 들춰내는 것 자체가 반국가적 행동으로 탄압받아왔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는 ‘생존’을 위해 침묵했으며, 좌익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계속 여당만을 지지해왔고, 그들의 자녀들은 오히려 ‘연좌제’ 등의 불이익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하여 생존자나 유족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봉건시대의 천형이 이와 같았을까”라고 탄식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문제는 단순살인이 아닌 집단학살이다. 국제인권법과 국제인권관습법은 집단학살을 반인도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규정해 공소시효를 배제시켰다. 우리나라도 ‘집단살해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가입국이다. 3월7일 농성장에서 만난 정맹근씨는 “불행한 과거도 우리 역사다. 화려한 것만 역사에 남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면, 국민통합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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