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L님께
등록 : 2003-03-12 00:00 수정 :
지리산을 갔습니다. 노고단은 잔설로 눈밭을 이루었는데 피아골 아래는 봄기운에 매화가 한창입니다. 겨울과 봄, 두 계절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메일로 틈틈이 의견을 주시는 독자 L님. 섬진강 따라 구례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면서 L님 생각을 했습니다. 전남 보성이 고향이라고 했지요. 저는 지리산 건너편 경남 함양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전남 구례, 경남 하동이라고 경계를 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도 부족해 덧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유유한 산하만 있을 뿐, 영호남을 구별짓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경의선을 타거나 동해안 길을 따라서 철조망 너머로 가도 아래위가 나뉘어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지요.
새해 특집 ‘행복의 샘 웃으면 솟는다’가 가슴에 와 닿았다며 95점을 주신 독자 L님. 앞으로도 이맘때쯤 지리산을 찾을 작정입니다. 언젠가 보성 차밭에도 가겠습니다.
L님이 때로 격려하고 때로 나무라온 <한겨레21>이 9돌을 맞습니다. 숱한 신문과 잡지 속에서 <한겨레21>은 세상을 알릴 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겠다며 자리를 차지해왔습니다. 억압과 차별에 맞서고 사람과 사람, 인간과 세상이 소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왔습니다. L님과 같은 독자, 그리고 독자편집위원들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잡지(Magazine)는 원래 창고·곳간이란 뜻을 가진 히딩크 감독의 나라 네덜란드 말(Magazien)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곳간에 알곡과 볍씨와 도구를 알뜰하게 챙기면 보고가 됩니다. 쭉정이와 허접스레기를 넣으면 헛간이 되겠지요.
저 자신 첫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100쪽 안팎의 우리 잡지가 여문 알곡으로만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자편집위원들은 우리가 더욱 치열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더 심층적이면서 다양해질 것을 주문합니다. 또한 좀더 설득력을 가지라고 합니다. 의견 주시는 독자분들의 생각도 L님의 견해도 그렇습니다. 별 말씀 없는 독자분들의 기대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한겨레21>이 더없이 알뜰한 보고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드는 안팎의 사람들이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신문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정도로 독립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좀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견실한 네트워크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꿈을 꿉니다. 노무현과 김정일, 부시 3자 지상토론으로 평화를 끌어내고 해외언론은 <한겨레21> 영문판을 인용합니다. 우리에게 <슈피겔>을 능가하는 권위지가 있는 덕분입니다. <한겨레21>이란 버팀목이 있어 노동자는 분신하지 않고 양심적 병역거부의 지축이 돌려집니다. 논술교재로 삼고 싶어하는 중고생들은 가격 부담 없이 잡지를 보고 문화적 소양을 쌓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들과 손잡고 한-베평화공원을 방문합니다.
독자 L님이 같이하면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
올 들어 잡지를 찾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세상의 변화를 읽으려는 욕구가 큽니다. 10돌을 맞는 내년에는 신뢰의 뿌리, 소통의 가지가 더욱 굳건히 뻗쳐 있을 것입니다. 참 디자인을 바꿨습니다, 주인 L님.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