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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성애 담론, 인권의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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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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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프로그램에서 잘리는 쓰디쓴 체험… 활발한 토론 벌이며 지지모임도 결성돼

(사진/동성애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의 기자회견)
커밍아웃의 첫맛은 썼다. 탤런트 홍석천은 커밍아웃하자마자 방송에서 아웃당했다. 동성애자가 착한 어린 양 물들일지 모른다고 오해하는 방송사 어르신들은 그에게 문화방송 <뽀뽀뽀> 출연정지를 ‘명’했고,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시트콤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는 그를 식구에서 내쳤다. “미워 죽겠어!”라는 쁘아종 특유의 앙탈 한번 못 부리고 그는 고분고분하게 방송사를 나와야만 했다. 그게 캐스팅 당해야 하는 동성애자 연예인의 운명이었다. 입맛이 쓴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새 탤런트 홍석천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오늘 한국에서 홍석천은 곧 남성동성애자고 남성동성애자는 곧 홍석천이다. 한 사람의, 한 사회의 견고한 벽장을 뚫고 나온(coming out of closet) 이 아이콘은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끝없는 수근거림, 책 팔려는 쇼라는 소문도


스포츠신문과 여성지로부터 떠밀리듯 출발한 그의 커밍아웃 여정은 각 방송사 연예오락프로그램의 카메라 세례를 거쳐 험난한 인터넷 바다 속에 던져졌다. 긍정과 부정, 동정과 혐오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이 동성애자 아이콘은 그의 ‘방송 출연권’을 옹호하는 각 신문 방송면에 며칠 안착했다가 문화방송 라디오 <여성시대> 전파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토크쇼는 하염없이 공중을 떠돌던 그를 잠시 다시 카메라 앞에 불러 앉혔다. 한국사회 전체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찍는 듯했다. 모두들 동정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구경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수군거렸다.

은밀한 수군거림, “결혼했다” 혹은 “원래 <뽀뽀뽀>에서 잘릴 예정이었다”는 등 구구한 뒷소문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자서전 좀 팔아 보려고 커밍아웃 ‘쇼’를 했다는 소문은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다. 책 얘기를 꺼내자 그는 말문이 턱 막히는 듯 숨부터 골랐다.

“혹시 책을 낼지도 몰라요. 어쩌면 제게 남은 선택은 그것밖에 없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만약 책 팔아 몇억을 번다고 칩시다. 굳이 커밍아웃하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다면 그건 몇년이면 벌 수 있는 돈입니다. 돈 때문이라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죠….”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의 기자회견은 그(의 문제)를 가까스로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인권활동가, 여성운동가, 교수, 국회의원 등 ‘이성애자로 여겨지는’ 100명이 참여한 이 모임은 기자회견문에서 “이번 사태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서 지극히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며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을 둘러싼 맹목적인 공격과 비합리적인 혐오를 물리치는 데 우리의 힘을 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홈페이지의 지지서명자 2만명을 향하여…

지지모임 기사는 각 신문 사회면 한구석을 채웠고 비로소 그의 커밍아웃은 가십거리 수준을 벗어났다. ‘동성애’는 한국방송공사 <길종섭의 쟁점토론> 주제로 선택됐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ARS투표 결과. ‘동성애를 인정 못 한다’는 의견은 2만3천여표를 얻어 ‘인정한다’(1만3천여표)를 압도했다.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조사결과와 대비되는 대목이었다. 이 토론의 패널로 나온 동성애자인권연대 임태훈 대표는 “공중파 방송에 나간 뒤 오히려 동성애자인권연대 홈페이지에 노골적인 (동성애) 반대글이 부쩍 늘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심지어 “밤거리에서 몸조심해라” 하는 협박성 글도 종종 눈에 띈다. 그동안 잠재돼 있던 이 나라 호모포비아(Homophobia·동성애혐오증)가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계기로 드디어 커밍아웃하고 있다.

그를 위무할 소식도 있다. ‘지지모임’의 홈페이지(comingout2000.org)의 지지서명자가 열흘 만에 2천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 모임은 애초 서명자 2만명이 될 즈음 흥겨운 축하파티 한판을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이름하여 ‘커밍아웃2000 캠페인’. 지지모임은 2만명 고지를 넘기 위해 명동에서, 부산영화제 거리에서, 인권영화제에서 가판을 차릴 예정이다. 인터넷 한겨레 홈페이지에 개설된 ‘커밍아웃 토론방’도 열흘 만에 1천건에 육박하는 글이 올라와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한 인터넷에 올라온 격려문이다.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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