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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조 파괴, 인간성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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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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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낱이 폭로된 두산중공업 간부의 수첩메모…배달호씨는 어떤 조건에서 분신을 결심했나

새해 벽두에 터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 분신사망 사태가 이미 한달을 훌쩍 넘겼다. 사태가 풀릴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장기화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노동자 분신사건이 터지면 사태의 극단적 성격 때문에 노사 양쪽 모두 서둘러 수습에 나서므로 길게 끌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두산중공업은 딴판이다. 사태의 본질 때문이다.

사진/ 두산중공업의 각종 노조 파괴공작 문건과 수첩메모.

혀 내두르게 하는 방대한 블랙리스트


무슨 말일까 두산중공업의 노사갈등은 임금과 단체협약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는 게 아니다. 서로 주고받는 협상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동안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두산중공업 노사관계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핵심이다. 이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대한 자료와 문건이 최근 낱낱이 폭로됐다. 회사쪽이 치밀한 기획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해온 노조 파괴공작 문건으로, 각종 문건과 노사대책회의 내용이 적힌 회사 간부의 수첩 메모는 전향공작을 방불케 하는 병영적 노무관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중공업에서 두산중공업으로 민영화된 이후 지난 2년간 전방위적으로 진행된 노조 와해공작이 현장에 관철되면서 노사관계가 크게 왜곡된 것이다.

특히 조합원들의 성향을 세세하게 분류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는 등 노조를 사찰한 대목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회사쪽은 “여러 수첩의 내용은 어느 회사에서나 수행되고 있는 업무고, 개개인의 성향 파악도 일상적 노무관리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대기업의 노조 파괴공작이 ‘물증’으로 드러난 건 두산중공업이 처음이다. 이런 물증들은 배달호씨를 끝내 분신으로 내몬 굴절된 노사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신노사문화 정립계획’이란 문건에 따르면, 회사쪽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노조무력화 3단계 전략을 짠 뒤 ‘의식개혁활동’, ‘오피니언 리더 밀착관리’, ‘건전세력 육성방안’ 등 세부작전을 추진해왔다. 오피니언 리더는 조합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합원들을 성향별로 골라 친회사쪽 노조 대의원으로 포섭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조합활동가 100명을 집중 관리대상으로 선정해 1인당 50만원씩 포섭비용으로 책정했다. 오피니언 리더로 분류된 개별 조합원에게는 성향에 따라 온건(☆), 조합추종(☆☆), 강성(☆☆☆), 초강성(★★★), 합리적 인물 등 5가지 등급을 매겼다.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별 몇개로, 노사 동반자는커녕 ‘분위기 선동자’, ‘조합지침 신봉자’, ‘회사방침 부정적인 자’, ‘판단 불능자’로 낙인찍은 것이다.

두산중공업의 노조 와해 프로그램은 각 BG(Business Group·사업본부)별 노무팀 중심으로 이뤄졌다. 원자력 주기기과 검사1반은 반원 9명을 노조 참여도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한 뒤 해결책으로 A(자립), B(관찰), C(주기관리), D(지속관리), E(방치)로 다시 나눈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회사쪽에 호응적인 조합원은 ‘자립’으로, 반면 노조에 적극 참여하는 노동자는 ‘방치’ 대상자에 넣어 잔업·특근·진급에서 차별하고, 해고 대상에 올린다는 게 방침이다. ‘방치’에 속한 조합원은 실제로 해고되는 등 블랙리스트는 조합원 살생부나 마찬가지였다.

파업 참가자에겐 각종 불이익

사진/ 두산중공업 노조의 기자회견. (연합)
블랙리스트는 대학생들이 노동운동에 몸을 던지는 이른바 ‘존재 이전’이 활발하던 1980년대 대부분의 기업들이 공유한 문건이었다. 노동현장으로부터 불순분자를 영원히 추방한다는 목표 아래 기업과 정보기관들은 ‘위장취업자’와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각 사업장에 뿌렸다. 당시 ‘공안’ 차원에서 작성된 블랙리스트는 노무관리 담당자들의 책상서랍에서 쏟아지면서 폭로됐다. 일부는 일개 공장에서 만들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상세했고, 리스트에 오른 노동자들한테 A, B, C로 등급을 매겼다. 두산중공업에서 발견된 노조 사찰문건들은 블랙리스트가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작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장취업자나 해고자가 아니라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치밀하게 작성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2002년 4월 노무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차등관리방안’이다. 파업 참가자에게는 △잔업·특근을 통제하고 △기피업무로 배치 전환하고 △인원정리시 불이익을 부여하고 △연수 등 각종 혜택에서 배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민주노총은 “제조업 노동자들은 임금의 상당부분을 잔업이나 특근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쪽 말을 안 듣는 조합원에게 잔업·특근을 시키지 않는 방식은 경제적 압박을 통해 노조 탈퇴를 유도하기 위한 교묘한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파업 불참자에게는 반대급부를 듬뿍 안겼다. 잔업·특근 우선투입, 인사평가와 진급시 우대에다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특별 격려금을 주는 방안까지 기록돼 있다. 당근과 채찍으로 노동자들을 포섭 또는 배제하는 분할통제 전략이 그대로 구사된 것이다.

특히 한 회사 간부의 수첩에는 ‘구제불능’으로 판단된 강성 조합원은 △주차위반, 안전장구 미착용까지 철저히 체크하고 △경조사에 출장금지를 유도하고 △‘천적을 발굴해 설득하라‘는 메모까지 등장한다. 반면 온건파 육성을 위해 가정방문과 가족단위 모임을 개최하고 파업 불참자한테는 명절 때 선물을 주는 방안이 적혀 있다. 차등관리는 ‘파업 불참자가 노조에서 왕따당하는 일이 없게 회사쪽이 따로 배려하는 차원에서라도 파업 참여자에 대한 처벌은 꼭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2002년 7월8일자에는 파업 참가자에 대한 노조원 상호간 갈등·왕따로 파업을 근절한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다.

노조 파괴에 동원된 쪽은 개별 조합원들과 직접 부딪치는 현장 관리자(직장·반장)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조합원이었다. 이들에게는 순치 대상 조합원 두세명씩을 붙였는데, 노동자를 이용해 다른 노동자를 치는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배달호분신사망대책위 조태일씨는 “분신한 동료의 영정 앞을 매일 지나가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회사쪽 눈치를 봐야 하고, 노동탄압 규탄대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동안 회사쪽의 조직적 사찰이 노조 파괴보다는 차라리 인간성을 파괴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회사쪽은 현장 관리자들을 앞세워 온갖 방법으로 노조 이탈을 독려하고 통제했다. 노조 이탈자를 만들지 못한 일선 관리자에게는 불이익을 주고, 밀착감시를 잘 수행한 우수관리자한테는 제주관광을 시켜줬다. 또 차장·과장급 관리자들도 똘똘 뭉쳐 현장 밀착관리에 나서게 했다. 회사 전체가 노조 무력화 광풍에 휩싸인 것이다.

싸가지 있는 조합원, 아리까리한 조합원…

사진/ 대기업의 노조 와해공작 물증이 드러난 건 두산중공업이 처음이다. 노동자들의 두산중공업 규탄집회 장면. (김종수 기자)
2002년 10월, 회사 간부수첩에는 과장급 관리자들이 점심시간이나 퇴근 뒤에 조합원들을 만나 맨투맨식 포섭을 진행한 사실을 상세히 적혀 있다. 조합원 가정을 방문해 부인들한테 남편의 노조 이탈을 종용하고, 파업 찬반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배달호씨 사건이 터지기 전날인 1월8일의 선무활동 보고서를 보면, 면담결과 조합원 최아무개씨 성향이 ‘A-’에서 ‘A0’로 바뀌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회사쪽은 조합원 개인별 성향을 파업 동기에 따라 금전·의리·가족 등으로 분류한 뒤, ‘S’(회사에 매우 우호적), ‘A+’(회사쪽에 우호적인 편), ‘A0’(중간에서 동요하는 부류), ‘A-’(노조에 우호적), ‘T/M’(노조에 매우 우호적) 등 5가지로 철저하게 분류했다. 문건이 발견되기 전 현장에서는 S는 ‘싸가지 있는 조합원’, A는 ‘아리까리한 조합원’, T/M은 ‘튀는 조합원’의 약칭이란 말까지 이미 나돌고 있었다.

두산중공업의 노조 무력화 공작은 일개 노무관리팀의 과잉충성에서 빚어진 게 아니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을 중심으로 한 핵심경영진의 총지휘 속에 말단 관리직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이고 집요하게 전개됐다. 간부수첩 메모에 따르면, 박 회장은 임원간담회에서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노사문화를 정립해야 한다. 중이 절을 싫어하면 떠나야 한다.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니 총알(돈) 추가보급” 등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회사쪽은 모든 조합원을 회사의 ‘직원’으로 전환시킨다는 계획 아래 현장 관리자 361명이 1인당 조합원 2명씩 722명의 모범직원을 창출하고, 이들이 다시 1명씩 ‘교화’해 1444명의 모범사원을 다시 만들어 1805명을 건전세력화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런 새 노사문화 정립을 위한 활동비 예산으로는 2002년에 11억5천만원을 책정했다.

회사 관계자는 “한국중공업 시절에는 노조가 시끄럽게 하면 공기업이라서 사장이 금방 요구를 들어줘버렸다. 그러나 민간기업으로 바뀐 만큼 법과 원칙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매끈한 논리다. 그러나 두산중공업이 외치는 법과 원칙은 포장에 지나지 않을 뿐, 실상은 눈 밖에 난 조합원한테는 잔업·특근 기회를 박탈하는 ‘뒤틀린 원칙’이었다. 금속노조 심상정 사무처장은 “두산은 법과 원칙을 줄곧 내세우면서도 오직 돈벌이에만 매달려 노동법이 인정하는 노조와 파업을 거부해왔다. 파업으로 생산이 멈추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업장은 노조를 귀찮은 존재지만 그래도 파트너로 인정하고 타협하는데, 두산중공업은 한순간에 노조를 없애기 어려워지자 단계적으로 무력화하는 수순을 밟아왔다”고 말했다.

회사쪽은 조합원들을 노조에서 떼내기 위해 고교동문·동향·해병동우회 후배 등 온갖 연고를 동원해 중간 관리직한테 노동자를 몇명씩 짝지워 밀착 선무활동을 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으로, 의리에 약한 사람은 인간관계로, 가족에 약한 사람은 가족관계를 이용해 철저히 사찰과 압박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제거대상’으로 내몰아 해고했다. 이에 따른 노조 약화는 지난 대선 때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현대자동차에서는 부사장의 안내를 받아 노동조합을 방문한 반면, 두산중공업은 아예 정문 출입도 못하는 극단적 사태로 표현됐다. 가압류 등을 앞세워 돈으로 찍어누르는데 강철 노동자라도 장사가 있을 턱이 없다.

숨쉬기조차 힘든 작업장 통제…

두산그룹 노사관계 역사를 냉혹하게 보면, 노조파괴를 앞세운 회사쪽의 승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회사쪽은 마음만 먹으면 두산중공업노조를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금속노조 심상정 사무처장은 “노동조합 처지에서 볼 때 한국중공업 시절에는 목검승부였다면 사기업 두산중공업으로 넘어간 뒤에는 진검승부가 벌어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조합원의 파업 참여시간을 날짜별로 죄다 체크해 개인별 파업 참여율까지 분석한 문건은 회사의 노조 무력화 공세가 얼마나 폭넓고 과학적으로 이뤄졌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회사쪽의 노조 파괴 문건들은 배씨의 죽음이 숨쉬기조차 힘든 작업장 통제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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