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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바그다드에선 아무도 믿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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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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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의 전쟁위기 이라크 현장을 다녀온 프리랜서 방송PD 김영미씨는 말한다

프리랜서 방송 프로듀서 김영미(33)씨가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라크를 최근 현지 취재했다. 카메라 각도까지 지시하는 이라크 정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진행된 그의 취재기는 전쟁을 앞둔 바그다드의 긴박한 분위기와 서민들의 신산스런 삶의 풍경을 전해준다. 그가 바그다드에 머문 기간은 모두 23일. 요르단 암만에서의 체류기간을 포함하면 석달의 여정이었다. 취재내용을 담은 <일촉즉발의 전쟁위기, 이라크 현장을 가다>는 SBS에서 오는 2월26일 저녁 11시에 방송된다. 아래 내용은 김 피디가 구술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사진/ 바그다드 거리를 걷고 있는 시민들.
이라크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비자를 신청한 것은 지난해 9월 말이었다.

비자 발급이 굉장히 어렵다는 얘기를 들어서 걱정했는데, 예상대로였다. 일단 도쿄 주재 이라크 대사관에 비자접수를 했다. ‘탈레반 붕괴 100일, 부르카를 벗는 아프간 여인들’(한국방송 <일요스페셜>)을 일본에서 방송하기 위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자 신청을 해놓고 대사관 직원에게 언제 나오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항상 ‘인샬라’였다. ‘도저히 안 되겠군’ 하고 생각하던 차에 “암만으로 가라”는 지령 같은 회신이 돌아왔다.


프레스센터에서 무작정 떼를 쓰다

요르단 암만으로 날아간 것은 지난해 11월9일. 그러나 길은 보이지 않았다. 도쿄의 이라크 대사관에 책임지라고 협박전화를 하고 암만의 한국 대사관에도 가서 졸랐다. 이라크 대사관에는 매일 출근해 아침 저녁으로 괴롭혔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남들이 들어갈 때 살짝 묻어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라크 외무부 비자담당 직원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전화로 협박공세()를 시작했다. “너, 지금 한국의 반미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아니 한국 사람 한 사람이라도 받아주면 너희들은 오명을 벗을 수 있어. 그런데 암만에 있는 나조차 안 받아주냐 너희들 한국이 반미에다 반이라크 되는 거 보고 싶냐”

사진/ 후세인 동상 앞을 행진하는 시민군.
촛불시위 등의 기사를 프린트해서 팩스로 넣어주고 계속 압박했다. 결국 암만에 도착한 지 한달 만에 취재비자가 나왔다. 딱 열흘짜리였다. 바그다드로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프레스카드 만든다고 또 하루가 걸렸고, 정부가 가이드를 지정해주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이렇게 해서 까먹은 시간이 모두 닷새, 이제 남은 시간은 닷새밖에 없었다.

하지만 닷새로는 분위기 파악하기에도 벅찼다. "비자 연장이 안 되면 여기서 자살할 거다”라고 매달린 끝에 체류기간을 늘렸다. 이라크 담당직원은 “우리 이라크의 적은 미국이 아니라 김영미 너"라고 했다.

바그다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휘황찬란한 거리에 놀랐다. 가게가 많고, 시장이며 약국에 물건이 넘쳐흘렀다. 기름값이 싸니까 아침마다 교통체증도 심했다. 잘사는 나라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면을 파고드니 그게 아니었다. 한달에 1달러밖에 못 버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넘쳐나는 물건들은 너무 비싼 것이었다. 식량은 배급제니까 밥은 먹고 사는데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못하는 거였다. 밥은 그득히 퍼주는데 외출할 버스비가 없는 거다. 아이들은 노트를 지워서 쓰고 또 쓰고 했다.

웬지 가면을 쓴 듯한 이라크인들

사진/ 후세인의 연설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모여서 TV를 본다.
기형적 경제사정을 알고 난 뒤에는 이라크 사람들이 왠지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행인으로 지나가던 사람이 관광객·상인으로 모습을 바꿔 내 앞에 계속 나타났다. 외국인 취재진에게 따라붙는 비밀경찰이었다. 점심 먹으러 아무 데나 골라서 가는데, 프레스센터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식당으로 걸려올 정도였다. 휴대폰도 없는데 말이다. 나 하나에 감시하는 사람이 10명은 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감시요원들의 얼굴을 알게 돼 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게다가 가이드도 비밀경찰, 운전사도 비밀경찰이었다. 나를 감시하는 동시에 서로를 감시했다. 그들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미리 교육을 해놓은 것 같았다. 항상 똑같은 대답이 나왔으므로 인터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랍말을 전혀 모르는 나도 똑같은 단어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우선 삼성·LG 등 이라크에서 인지도가 높은 기업체들의 이름을 팔았다. “한국의 기업들이 이라크 학교에 컴퓨터를 얼마나 팔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는 말로 학교 취재를 뚫었다. 이렇게 해서 무스타파(남·11)와 라팔(여·9)을 만났다. 특히 라팔은 무척 예쁜 아이였다. 처음에 그 아이들의 집에 가겠다고 했더니 못 가게 했다. “북한에서는 배급식량의 질이 형편없다고 하더라. 너희들도 그렇지”라고 유도를 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식량의 질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라팔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전쟁에 대비해 2달치 식량을 한꺼번에 배급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먹을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라팔이 보고 싶어 죽겠다고 해서 집에 간 뒤 몰래 카메라를 돌렸다. 한국 대사관에 들렀다가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다른 차로 갈아타기도 했다.

사진/ 라팔(9)과 엄마 이말. 그들은 다가오는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이틀 건너 하루씩 그 집에 갔다. 아이들과는 어느새 정이 들어 있었다. 카메라를 든 채로 작별 인사를 하는데, 라팔이 굉장히 세게 뽀뽀를 해서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올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제발 살아 있어야 한다.” 혼자 한국말로 속삭였다. 가슴이 아팠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의 교육은 완전히 무너진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수업이라는 것이, 선생님이 “소리에는 뭐가 있죠” 하고 물으면, 아이들이 “동물소리요, 새소리요” 하고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과학시간에는 물컵에 양파를 올려놓고, “이게 뭐죠 양파 뿌리요” 하는 거였다. 선생님 월급이 이라크 돈으로 3천디나르, 우리 돈으로 4천만~5천원에 불과했다. 고급 관료들 자녀의 과외 자리라도 얻지 않으면 교사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자 선생은 하나도 없고 모두 여자 선생뿐이었는데, 내 느낌에는 동네 아줌마들을 데려다놓고 시간만 때우는 것 같았다. 그들은 “훌륭한 교육환경”을 자랑했다.

호텔은 거대한 경찰서였다

사진/ 미국의 폭격으로 480명의 어린이와 여성들이 숨진 바그다드 시내의 알 아마리아 방공호 내부.
나를 안내한 가이드 머피트를 보면 불운한 시대를 타고 태어난 엘리트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았다. 교육은 받을 만큼 다 받았는데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눈치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엘리트. 그도 원래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먹고살 수 없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취재할 때 그는 고향에 온 것처럼 좋아했다.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버리고 엉뚱한 짓을 해야 하는 그를 보며 굉장히 안타까웠다. 그는 세상이 좋아지면 다시 학교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 머피트의 통제는 정말 대단했다. 카메라 각도까지 정해주고 스타트와 스톱을 명령했다. 일반 서민들과 오랫동안 있지 못하게 하려고 계속 “다 했나 다 했나” 하며 채근했다.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라크 교육의 문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통제도 덜해졌다. 그리고 카메라를 끄면 조금씩 조금씩 진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담 후세인에 대한 얘기를…. 국민의 대부분이 속으로는 사담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그다드 카페에서 사담의 텔레비전 연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지친 표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머피트는 “영미, 네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바그다드 바깥으로 나가면 정말 못사는 사람도 있어. 바그다드에서는 아무도 믿지 마. 심지어 나도 믿지 마.” 나는 그가 말을 좀 한다 싶으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차도르 속에 마이크를 숨겼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은 외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스파이라고 생각했다. 이고 뭐고 모두 납작 엎드려서 이라크 정부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정말 착하게들 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취재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열흘 동안 한 장면도 제대로 못 찍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부터 사담 후세인과 정치 얘기를 늘어놓으니 취재가 될 리 만무했다.

내가 묵은 호텔은 전체가 하나의 경찰서였다. 바그다드 안에서는 휴대전화가 없기 때문에 위성전화를 써야 한다. 이라크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위성에 굉장히 민감하다. 기자들에 한해 위성전화를 허용하는데, 대신 이것도 하루에 100달러씩을 내야 한다. 단 프레스센터 안에서만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나는 규칙을 무시하고 방에서 몇번 썼는데, 청소부(청소부도 공무원이다!)가 신고를 하는 바람에 한바탕 승강이를 벌였다.

참혹한 흔적, 알 아마리아 셸터

사진/ 이라크 정부는 전쟁준비를 위해 석달치 식량을 한꺼번에 배급했다. 식량을 쌓아놓은 한 가정의 창고.
암만에서 만난 움모 아하마드(59)는 사담 후세인에게 아들을 빼앗긴 엄마였다. 1992년의 사담 후세인 반대 시위에 그녀의 아들이 연루됐는데, ‘밤중에 조용히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남편은 이란 전쟁 때 죽고 그녀는 요르단으로 도망나왔다. 아들 9명에 딸 2명이던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는 “바그다드에서 사담 욕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고 했다. 앰네스티는 이라크에서 한해에 10만명이 처형된다고 집계했다. 사담 후세인은 집권하자마자 반역죄로 각료 21명을 처형했다. 여기에는 자신의 혁명동지이자 가장 친한 친구도 포함돼 있었다. 말 그대로 공포정치 그 자체였다. 그런데 요르단에 있는 이라크인들조차 왜 왔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관광 나왔다고 대답했다. 이라크는 너무 행복하고 풍족하다고 답했다. 찬 시멘트 바닥에 포대 같은 것을 깔고 자는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쟁의 참혹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난 1991년 걸프전 때 미군이 폭격한 바그다드의 난민대피소인 알 아마리아 셸터였다. 여자와 아이들 400여명이 죽었는데, 이 사건이 걸프전이 끝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라크 정부는 십몇년이 지나도록 그걸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벽에는 아직도 사람의 피부조직이 들러붙어 있었다. 미국은 이 시설을 적의 벙커로 오인한 모양인데, 중요한 것은 귀한 생명들이 죽어나갔다는 거다. 더군다나 여자와 아이들만.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구나,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 모든 것이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아닌가.

바그다드를 다녀왔지만 내가 본 것은 바그다드의 절반도 못 된다. 나올 때는 나중에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비자를 한번 더 받아서 나왔다.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찍기 위해서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반전이나 운동 같은 것은 잘 모른다. 다만 내가 만났던 바그다드 사람들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 많은 라팔들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많은 라팔의 엄마들이 아이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정리/ 이재성 기자 firi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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