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은 무죄
등록 : 2003-02-13 00:00 수정 :
로또 광풍이 쓸고 간 자리에 2608억원이란 숫자가 눈길을 잡습니다. 4주 만에 모인 판돈이 뜨거운 감자가 된 ‘2235억원’을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로또에 쏟아부은 돈과 북한에 어떤 연유로 대준 2천억원대의 돈.
둘 사이에 연관성은 없지만, 나라 거덜낼 정도는 아니고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모을 수 있는 금액이구나, 그리고 복권 살 여력으로 북한동포 돕기에 나설 수는 없었던가.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돈에도 위신이 있다면 복권으로 흘러들어간 것보다는 그래도 북으로 간 다발이 더 폼잡을 것 같습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북한에 흘러들어간 돈뭉치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외신은 그러나 서울이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다고 전합니다. 전쟁준비한답시고 등화관제까지 하며 긴장감이 흐르는 평양과 너무 다르다고 합니다.
서울은 평양에 비해서는 물론 과거보다 평온합니다. 결정적 전환의 계기는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일상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정상회담으로 남과 북은 말이 통하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평화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허리춤에 붙어 북한을 쳐다보던 우리가 5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 사이로 걸음을 뗐습니다. 돈으로 샀건 금으로 샀건 이것은 빛이 바래지 않을 정상회담의 역사적 성과입니다.
남북관계의 현실을 볼 때 정상회담에 이르는 과정이 ‘공개적이고 민주적이고 순리대로’ 진행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의 해산과정을 “그때 나는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남북이 대결에서 화해로 가는 대전환은 숭고하지만 범벅이고 어수선한 출산과정과 다르기 어렵습니다. 창조란 거칠고 격렬하고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면책되고 비밀주의가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첫 정상회담의 물꼬에 한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수단이 생명과 자유를 담보로 하지 않는 한. 특히 스스로 유전자를 조작해 친미반공을 체질화한 세력들이 절차상 문제를 고리로 정상회담에 이른 성과와 남한의 홀로서기를 열심히 흔들어대는 무중력적 현실에서는.
지금이 2000년 5월이고 돈문제가 불거졌다고 해도, 저는 가자고 할 것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돈으로 샀다고 하더라도 정상회담에 무죄평결을 내리고 싶습니다. 다만 내역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드러날 것을 각오했겠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몇푼을 국내에 리베이트로 빼돌렸다면 그 손에는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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