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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준비됐나요, 그럼 웃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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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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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흉내로 ‘광팬’ 모으는 개그맨 서남용… 옥탑방을 연습실 삼은 심야의 웃음 전도사

사진/ 서남용씨가 첫 방송에서 흉내낸 풀 뜯어먹는 낙타. 그는 일상의 소품에서 추상적 사물까지 흉내를 내고 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웃기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가족도 친구들도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웃기는’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몰래 남들을 웃기고자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그는 웃기는 사람이 됐다.

매주 금요일 밤 자정 넘어 리모컨을 돌리다 보면 한순간 “어 뭐야” 하며 멈추게 된다. 교과서 읽듯 읊는 경상도 말씨에 잔뜩 주눅든 표정으로 온몸을 덜덜 떨며 “안녕하세요. 저는 사물흉내 개그의 서남용입니다. 제가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데 모두 저의 형, 누나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해보겠습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을 만난다. 길쭉한 몸매, 더 길쭉한 얼굴, 나사 풀린 눈빛, 덥수룩한 머리, 그 머리에 얹힌 머리띠…. 그저 가만히 서 있어도 황당하지만,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떨리는 몸으로 표현하는 온갖 사물들

사진/ 덜덜 떨리는 팔다리. 잔뜩 주눅든 표정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서남용씨가 사물을 흉내내면 관객은 순간 아연해지다가 포복절도한다.


“낙지, 어머니가 사오신 싱싱한 낙지는 이렇습니다.” 딱 접시 위에 담긴 낙지처럼 팔다리, 몸뚱어리를 따로 놀린다. “이런 낙지를 초장에 찍으면 이렇습니다.” 초장에 ‘찍혀’ 사력을 다해 버둥거리는 낙지를 선보인다. 흉내는 끝이 없다. 젓가락으로 집은 도토리묵, 숟가락으로 뜬 순두부(그러다 밥상 위에 떨어진 순두부), 녹차 티백 등 밥상 위 먹을거리에서 바닷속의 방랑자 해파리, 사냥꾼을 만나 도망가는 나무늘보, 풀 뜯어먹는 낙타 등 동물, 지하철역 변기통에 빠져 내려가는 휴지, 차례 끝내고 접힌 제사상, 입 속에서 씹히는 껌 등 일상의 소품, 나아가 발냄새, 향수, 중앙선 등 추상적 사물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아무런 대의나 명분이 없는 것들이다. 흉내내는 틈틈이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반장 표정으로 수첩을 꺼내 “어색한 웃음, 마지못해 치는 박수, 네 번째 줄에 앉은 저 누나 너무 무섭다”라고 적어넣는다. 이쯤 이르면 객석에서 폭소와 박수가 터져나온다.

서씨는 지난해 말 ‘혜성처럼’ 등장했다. 본격 스탠드업 코미디를 표방하는 한국방송 2텔레비전 <폭소클럽>(금요일 밤 12시15분)이 발굴한 새로운 얼굴이다. 2000년 군 제대 뒤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개그맨 공채 시험에 응시했지만 3년 내리 떨어졌다. 첫 응시 때는 준비해간 콩트의 첫마디도 못 꺼냈다. 기라성 같은 방송사 간부들과 선배 개그맨들 앞에 서자 “머릿속이 하얗게 빈 듯했다”. 덜덜 떨며 서 있다 “다음” 소리를 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와야 했다.

남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남 웃기는 일을 하려는 의지는 자신이 흉내낸 해바라기처럼 발딱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온갖 ‘알바’를 전전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몇달 닥치는 대로 일해 용돈을 벌고, 또 몇달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작심한 듯 다가앉은 어머니. “남용아, 내 말 잘 듣거라. 니 낼 나랑 같이 병원 가자.” 멀쩡한 아들이 제대한 다음 학교(상주대 섬유공학과)로는 안 돌아가고 허구한 날 방에 처박혀 거울만 보고 구시렁대고 있으니, 복장이 터지다 못해 불현듯 걱정이 됐을 것이다. 그러길 3년. 지난해 가을 신인 개그맨 등용문으로 자리잡은 한국방송 위성채널의 코미디 프로그램 <한반도 유머총집합>의 펀 스테이지 코너에 섰고,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프로그램을 본 <폭소클럽> 연출가 서수민 피디의 눈에 띄어 발탁된 것이다.

12월27일 첫 방송이 나갈 때까지 아무도 그가 개그맨이 되려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부산에 사는 부모님과 여동생은 물론이고 무작정 상경한 그에게 단칸방 한쪽을 내준 사촌동생까지. 첫 방송 날 어머니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남용아, 니 텔리비에 나왔데. 우째 된 기고” 그는 “무슨 소리고 내 아이다”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창피해서다. 그는 인터뷰 동안에도 계속 손을 떨고, 말을 어눌하게 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수줍음 많은 사람이 어떻게 개그맨이 되려 했는지 의문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남을 웃기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내성적인 성품이었지만 수업시간이나 친구들하고 놀 때 자신이 한마디씩 툭툭 날린 멘트에 사람들이 “뒤집어지는 게” 좋았다고 한다. 또 그런 그의 배꼽을 잡게 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시장에 다녀온 어머니는 남매를 앞에 놓고 길가다 만난 다리 저는 강아지, 좌판에 널려 있던 고등어 따위를 흉내내곤 했다. 애들이 원하는 치킨, 피자를 양껏 사주지 못하는 살림이라 몸으로 때운 셈이다. 어머니가 선사해준 웃음은 삶의 보약이었다.

눈밝은 시청자들은 벌써 그의 팬클럽(http://cafe.daum.net/tjskadyd)을 인터넷에 만들어놓았다. 1월달에는 첫 번째 ‘정모’도 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왔다”고 하기에 몇명이나 왔느냐고 물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네명이오.”

사물흉내 개그라는 개인기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그런 개인기를 보고 웃을 준비를 한 관객들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유 있어졌고, 동시에 날카로워졌다. 어눌하지만 참신한 개그는 기꺼이 격려하며 웃지만, 쥐어터지는 바보 흉내나 해학 없는 말재간에는 싸늘하게 팔짱을 낀다. 한마디로 그 밥에 그 나물인 개그는 봐주지 않는다. 바뀐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유행어가 될 말을 퍼뜨릴 때보다 도리어 “어,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지는 줄 알았는데 왜 안 터지지”라는 말에 관객은 박장대소한다. 나랑 가깝기 때문이다. 잘 까부는 고교 동창처럼, 분위기 메이커인 팀 동료처럼, 웃기는 친척 아줌마처럼 사람들은 ‘나의 일상’에 들어온 개그를 즐긴다. 그런 심리를 포착한 것이 나홀로 무대에 올라 관객을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다. 사물흉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해 관객을 누나, 형으로 여기며 무대에 서는 서씨의 개그는 이런 추세와 궁합이 잘 맞는다.

비공채면 어때, 팬들이 따라 웃기는데!

서씨의 한 ‘광팬’이 팬클럽 사이트와 그의 메일박스에 남긴 글은 이렇다. “지난 설에 친척들이 모여 멀뚱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인사한 뒤, 남용 오빠가 선보인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멋진 방패연’의 동작을 흉내냈습니다. ‘다운됐던’ 분위기 확 살아났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기량을 갈고 닦아 가족과 친구들을 즐겁게 하겠습니다.”

한회 출연료 14만여원, ‘약발’ 떨어지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비공채 출신의 ‘일반인’이지만 서씨는 요즘 길을 가며 웃음 흘릴 일이 생겼다. 지하철 탔을 때 누군가 “야, 저 사람 도토리묵 아냐”라고 수군댈 때, 용감한 행인이 뒤에서 그의 흉내를 내며 “뽀너스∼ 누나, 형에게 드리는 뽀너스∼”를 연발할 때면 더욱 그렇다. 서씨에게 개그가 좋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남도 웃고 나도 웃고. 그래서 오늘도 사촌동생 옥탑방에서 손바닥만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맷돌과 샤프펜슬, 바퀴벌레를 연습한다.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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