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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2235억원의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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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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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툼과 합의를 이루어내는 정치과정이다. 먼저 대북 송금사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 국민이 충분히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정치적 다툼을 충실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후에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

김대영/ 성공회대 연구교수
나는 ‘정쟁’(政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의 세계에는 늘 다툼이 있게 마련인데, 굳이 정쟁이라는 말로 다툼을 비난하는 사고방식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다툼은 정치의 출발점이다.

물론 정치의 세계에는 다툼과 더불어 합의를 형성하는 과정이 있다. 언제나 다투기만 하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고 투쟁일 뿐이며 결국은 총칼로 승부를 내게 된다. 따라서 민주적 정치과정에서는 토론·설득·타협을 통한 합의 도출을 정치의 종착역으로 인식한다.

너무 조급한 종결


정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툼과 합의의 합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현대상선의 2235억원 대북 송금사건도 예외 없이 다툼과 합의의 정치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진상규명, 특검제, 책임자 처벌, 대통령 사과 등을 요구하는 공격논리와 긴장완화, 평화공존, 국익, 통치행위 등으로 이어지는 방어논리 속에서 정치적 다툼의 실상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젠가’의 시점이다. 이 점에서 ‘초법적 통치행위’라는 말로서 사건을 종결하고자 하는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조급한 것 같다. 정치적 다툼에 필수적인 시간 문제를 도외시한 채 성급하게 다툼을 종결시키려고 했다. 정치적 다툼이 논쟁으로 발전하고 나아가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일정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은 자체만을 놓고 볼 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235억원이 아니라 그 10배라도 북한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햇볕정책에도 도움이 되고 기업에도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라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심각한 문제는 그 과정이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정부 태도다.

먼저 진상규명을 회피하는 김 대통령의 입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현 정부 나름의 속사정이 있겠지만 떳떳하게 국민에게 진상을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국민은 단순히 선거 때 표 찍어주는 거수기가 아니다. 정치적 다툼 속에서 판단력을 키우고 정치적 합의 속에서 지혜를 배우는 이 나라의 주인을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겠는가

‘초법적 통치행위’란 말은 그 자체로 거부감을 준다. 도대체 대통령은 법을 어겨도 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법 위에 존재하는 초법적 행위자는 법 제정의 권한을 갖고 있는 주권자 외에는 있을 수 없다. 과거 왕조시대에는 국왕이 초법적 통치권자였다면, 오늘의 민주주의 시대에는 국민만이 유일한 주권자일 뿐이다. 국민을 대리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또는 법관들은 법의 범위 안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할 따름이다.

‘햇볕정책’은 탈냉전시대에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획기적 정책이다. 이론적 뿌리는 독일 통일과정에서 검증된 점진적·기능주의적 접근이론으로서, ‘햇볕’이라는 명칭이 내포하는 자기 중심성만 극복할 수 있으면 통일정책의 근간으로 삼을 만하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법을 어기면서까지 추진해서는 안 된다. 국민은 그런 권한까지 대통령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국가비상사태시 대통령에게 제한적으로 초법적 권한을 부여했지만, 그것 또한 헌법에 규정되어 있고 사전·사후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

대북 송금사건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실정법 위반을 어떻게 처리할지 해법을 찾는 일이다. 현직 대통령이 스스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자수()를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툼과 합의의 정치과정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를 처벌할 경우 햇볕정책의 기조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남북관계가 냉각될 우려가 높다. 북한 핵문제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마저 얼어붙으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진다. 반면 현 정부의 위법행위를 눈감아줄 경우 ‘초법적 통치행위’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툼과 합의를 이루어내는 정치과정이다. 먼저 대북 송금사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 국민이 충분히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정치적 다툼을 충실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초법적 통치행위의 위험성과 더불어 햇볕정책의 필요성을 국민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충분한 논쟁이 선행돼야겠다. 그런 이후에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

국민이 이번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경우 결코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한다. 반대로 지겨울 정도로 논쟁을 벌였음에도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정치권 전체가 무능한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충분히 다툼을 벌이고 나서 합의의 시점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지혜의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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