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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전승욱] “정확히 102억2100만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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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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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가압류에 묶여도 ‘개전의 정이 없는’전승욱씨… 해고된 뒤에도 회사 간부들의 밥상을 바꾸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가압류당한 금액이 얼마라고요” 전승욱(40)씨는 웃으며 답한다. “102억원이오. 처음에 14억원, 다음에 25억8천만원, 세 번째로 62억4100만원이었으니까….” 나는 얼른 계산기를 꺼내 눌러보았다. 정확하게 102억2100만원이다. 전승욱씨는 그 돈을 갚기 위해 앞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야 할지 모른다.

해고·구속·가압류. 그 어느 것도 전승욱씨의 힘찬 발길을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류우종 기자)

고1 때 광주항쟁에 참여하다

전남 흑산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승욱씨가 목포로 ‘유학’을 나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대한 뒤 ‘한전’에 입사한 것은 1987년 12월이었다. 흑산도 내연발전소에서 집채만한 큰 엔진을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소음성 난청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회사에서는 ‘본래부터 귀에 질병이 있었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더군요. 그러면 직업병이 아니니까 저를 작업전환시켜야 할 의무가 없어지는 거지요. 각서를 쓰면 고향인 흑산도에서 계속 일하게 해주겠다면서….” 각서를 마다한 전승욱씨는 91년에 여수화력발전소로 작업전환조치됐고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차츰 높아질 즈음 ‘국회 앞에서 배를 가른 전력노조의 인물’ 이준상씨가 여수화력발전소로 오면서 함께 의기투합했다.

강직한 공무원이던 아버님의 모습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전승욱씨가 “회사와 어용노조 집행부에 맞서며 동료직원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버님은 한마디로 딸깍발이(신이 없어서 마른날에도 나막신만 신는다는 뜻에서, 가난한 선비를 가리키는 말)셨어요. 30여년의 공직생활 동안 청렴결백의 상징처럼 사셨지요. 명절 무렵 동네사람들이 집에 생선 한 마리라도 들고 오면 사람이 무안해할 정도로 ‘쓰잘데기 없이 그런 걸 뭐하러 갖고 왔느냐 당신이나 집에 가져가서 잘 먹으라’고 마구 역정을 내셨어요. 소흑산도출장소에 가서 10년 넘게 계시다가 나오실 때 섬사람들이 걷어준 전별금도 모두 돌려주고 명단만 갖고 오셔서는 ‘이것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일본에 밀항해서 유학까지 갔다온 분이셨는데….”

라디오 드라마 <광복20년>을 아버지와 함께 들으며 자란 전승욱씨는 초등학교 때 유신헌법을 배우면서 선생님에게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뽑는데 이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냐”고 따지기도 했다. 약자는 도와주고 강자한테는 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릴 적부터 있어서 불량한 선배들에게는 절대로 굴복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 친구들은 공부고 운동이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한다고 ‘도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닐 때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그날이 5월20일인가, 21일인가… 석가탄신일이어서 학교에 안 가고 시내에 나갔는데 광주에서 시위대 차량이 내려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하지요. 나는 그 차를 보자마자 친구들에게 ‘니들은 가. 나는 저 차 타야 돼’라고 말하고 바로 그 버스에 올라탔어요. 그 차들이 가게 앞에 서면 빵이 무더기로 올라오고…. 담배가게 앞에 서면 담배가 보루로 올라오고…. 시민들이 그렇게 응원을 하더군요. ‘광주사람들이 죽어가니까 구하러 가야 한다’고 8t 트럭으로 갈아타고 광주로 들어가다가 막혀서 돌아왔어요. 그때 우리 앞차는 들어갔는데…. 생(生)과 사(死)가 거기서 갈린 거지요.”

간호사 김시자씨 분신에 충격을 받다

1996년 1월12일, 전력노동조합 한일병원지부 위원장이던 간호사 김시자씨가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전력노동조합 중앙위원회 회의장에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회의에서 김시자·오경호 두 사람에 대한 징계가 결의될 예정이었는데 집행부의 짜인 각본대로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김시자씨는 변론을 통해 “징계는 부당하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후배들에게 영원히 남을 전력노조 역사에 또 하나의 오점으로 기억되려는가” 등의 말을 남긴 채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불덩어리가 되어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김시자씨는 분신 뒤 동료의 품에 안겨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전력노조가 하루속히 변하기를 바란다. 양심대로 생활하는 조합원은 행동을 보여주기 바란다. 정리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노조는 아무리 법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가족 특히 어머님한테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가족에게 죄송스러울 따름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전승욱씨는 김시자 열사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옷깃을 여미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마디로 충격이었어요. 전력노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양심대로 행동하라’는 김시자 열사의 말이 정말로 비수가 돼 가슴에 와 박히더군요. 김시자 열사 아니었으면 오늘의 발전노조는 없었을 겁니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하늘을 보는 전승욱씨 모습을 보다가 나는 또 울컥 목이 잠긴다. 지난해 가을, 무주의 한 연수원에서도 나는 똑같은 그의 모습을 보았다. 강당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그가 강의를 듣다가 잠시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날 강의내용은 별것도 아니었다. 다만, 파업을 그렇게 허무하게 접고 난 뒤 해고되고 가압류당하고서도 한달에 사나흘 정도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열심히 뛰어다니는 활동가들의 마음가짐이 그만큼 비장했던 거다. 누가 감히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의 죽음을 비웃을 수 있으랴….

지난해 2월, 파업 때 전승욱씨는 발전노조 남동본부 조직쟁의국장으로 조합원들을 이끌었다.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일찍이 수배가 떨어졌지만, 전국에 흩어져 ‘산개파업’을 벌이는 조합원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녔다.

“전국을 싸돌아다니다가 3월10일에 대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잡혔어요. 딱 열흘만 더 있다가 잡혔으면 좋았을걸. 그때 영흥·분당이 흔들리던 시기여서 그 지역 한번만 더 돌아야 했는데….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있을 때 회사 총무부장이 찾아왔어요. ‘그래도 얘들이 최소한의 싸가지는 있나보다’ 했더니 ‘이런 역할 맡기는 싫은데…’라면서 해고통지서를 주는 거예요. 하하! 생일도 교도소에서 맞았어요. 파업이 진행 중일 때는 마음이 평온했는데 조합원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파업을 끝내고 복귀한 뒤에는 많이 괴로웠어요. 준상이가 교도소로 면회 오더니 아무 말 없이 ‘협상안’을 면회실 유리창에 딱 붙이고 보여줘요. 나는 그걸 보고 ‘차라리 위원장더러 직권조인하라고 해라. 그걸 합의안이라고…. 조합원 투표에 붙이지 말고 위원장 혼자 직권조인하고, 혼자 나쁜 사람 되는 게 낫다’고 했어요. 정말 탈옥하고 싶어지더군요.”

전승욱씨는 현재 해고된 상태다. “파업 시작하자마자 수배, 해고, 재산 가압류가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가압류는 해제했다는 말도 있는데 아직 통보는 못 받았고요. 직원이 모두 100여명밖에 안 되는 여수화력에서 16명이나 해고됐고 가압류 금액도 우리가 최고수준이에요.”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복직된 사람들도 있지만 전승욱씨는 “개전의 정이 전혀 없다”고 아직 복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고·구속·가압류 어느 것도 그의 힘찬 발길을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회사 간부들은 식당에서도 따로 차려주는 상에서 밥을 먹었어요. 이런 것부터 바로잡아줘야 되겠다 싶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식탁을 아예 걷어내버렸습니다.” “해고된 뒤, 최근에 그런 일을 했다는 거야” “그럼요. ‘당신들은 밥값 더 내고 먹느냐’ 그렇게 따졌지요. 이제는 모두 식판에 타서 잘 먹고 있어요.”

전승욱씨는 당분간 ‘김시자열사추모사업회’ 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지난 파업 때도 서울대에서 나오자마자 모란공원에 가서 전태일·김시자 열사 묘부터 찾아뵈었어요. 김시자 열사 묘 앞에서 ‘이제는 정말 자신 있게, 떳떳하게 왔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는데…. 파업이 그렇게 끝나버려서…. 그 파업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어져요. 이제는 전력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목표가 더욱 분명해진 거예요. 지난 파업 때도 수력·원자력이 같이 싸웠으면 이겼을 겁니다.”

“복직이 안 되는 바람에 할일이 더 많아졌다”는 그에게 마지막 말을 부탁했다. “어지러울 때 한몫 챙기는 기회주의자들은 늘 있어요. 파업 뒤에 승진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싸워야 얻는 겁니다.” 그는 또다시 싸우기 위해 부지런히 대의원대회 장소로 발길을 돌렸다.

하종강|한울노동자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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