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일의 싸움, 1513쪽의 기록
등록 : 2003-01-28 00:00 수정 :
2000년 1월22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수정다방. 억센 사나이 몇명이 모여 신세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한달 뼈빠지게 일하고 손에 쥐는 것이라곤 고작 84만5천원, 이래 가지고 먹고살 수 있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한탄은 점차 세상을 바꿔보자는 쪽으로 흘러갔다. “바꿔보자! 딱 3일만 일 제끼고 놀러가자!” 큰 주먹을 펴고 누군가 외쳤다.
처음에는 노동조합이 뭔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몇번의 비밀모임 과정에서 회사쪽은 움직임을 벌써 눈치챘다. 섣불리 집단행동에 나섰다간 계약직 처지에 당장 잘릴 게 뻔했다. 동대문·성북·월곡·혜화전화국 등지에서 모인 동지들은 25명. 노조설립을 둘러싸고 감돌던 약간의 불안감은 모이는 수가 불어나면서 희망으로 바뀌었다. “권리를 찾고 여태까지 착취당한 거, 부당한 거… 노조를 만들어 해결해나갈 수 있다. 저희는 뭐 단결도 투쟁도 몰랐습니다. 내가 볼 때는 (노조는)희망이었습니다.”(1권 18쪽)
노조 건설에 나섰지만 갑갑했다. 누가 계약직인지 정규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날마다 모여 회의하고 전화국 돌며 아는 사람들을 모조리 만났고 술 마시며 이야기했다. 힘든 줄 몰랐다. 그렇게 모인 211명의 계약직노동자들은 그 뒤 무려 517일간 눈물겨운 싸움을 벌였다. 신바람난 노조설립과 달리 투쟁은 엄혹한 현실이었고 벽이었다. 소중한 동지를 얻었지만 깊은 절망감과도 싸워야 했다. 어느새 그들은 한국 비정규노동자 투쟁의 상징이 돼 있었다. 하지만 2002년 5월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그 싸움의 기록이 최근 총 1513쪽의 투쟁백서로 오롯이 묶였다(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517일간의 외침> 전3권, 도서출판 다짐, 02-2236-3800). 백서 군데군데마다 211명의 눈물과 웃음이 생생한 육성으로 담겼다. 백서발간팀장
이운재(35)씨는 자꾸 감정이 치밀어올라 몇번이나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투쟁을) 평가조차 못할 만큼 기력을 소진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517일간의 투쟁평가는 노동운동진영의 몫입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