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는 남한에 5만명의 고정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냉전의식이 그들의 사회귀족화에 중요한 자양분이었다는 점과 함께 그들의 이성의 성숙단계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1월11일과 19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는 5만여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한달 전에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하라’, ‘여중생을 살려내라’ 피켓을 들고 ‘추모 촛불’의 물결을 만든 광장에 ‘미군 철수 반대한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다’ 등의 피켓이 들어찼다. 그 자리에서 어떤 목사는 “외신기자들과 미국 부시 대통령, 미 상·하원 의원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도록 좀더 큰 소리로 기도하자”고 외쳤다. 그는 남한에 5만명의 고정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는데, 냉전의식과 반북감정이 그들의 사회귀족화에 중요한 자양분이었다는 점과 함께 그들의 이성의 성숙단계가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교회권력의 위기의식
두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집회로서 시민광장의 성격이 있다면, 기도회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주도해 동원된 집회였다. 시청앞을 메운 인파는 친미사대주의 세력에게 아직 박정희식 동원력이 만만치 않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촛불시위가 대선을 앞둔 12월7일과 14일에 최정점에 이른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듯, 이번 기도회는 한국사회에 일고 있는 반미의식 고조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노무현 당선이 불러올 개혁과 변화에 대한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권력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거리로 직접 뛰쳐나왔다는 점은 여론 형성과정에서 조선-중앙-동아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노무현의 당선은 젊은 2030세대의 승리, 조중동에 대한 인터넷 매체와 네티즌의 승리라고도 하는데, 지금까지 조중동의 뒤쪽에서 독재자들을 위한 조찬기도회나 부흥회를 통해 편안하게 군림할 수 있던 수구적 교회권력이 직접 거리에 나섰다는 점은 흥미로운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즉, 시민사회에서 몇년 전부터 언론개혁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듯, 지금까지 성역에 머무른 종교계에 대한 개혁 요구가 앞으로 크게 제기될 것이라는 예측을 낳게 한다. 실제로 19일 기도회 한쪽에선 젊은 신앙인들이 한기총에 회개할 것을 요구한 게 그 단초를 보여준 것이다. 이성주의자들은 구약과 신약이 똑같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어법상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 각각 당시 인류 이성의 성숙단계에 맞춘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구약은 당시 인류 이성의 성숙단계가 아직 아동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대하듯 율법으로 말씀하셨다면, 신약은 예수님의 탄생 시기에 인류 이성의 성숙단계가 청소년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청소년을 대하듯 대화를 이끄시고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성주의자들의 해석을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현실에 적용해보는 일은 유익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이성의 성숙단계를 판단하는 데 참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어스름 저녁 무렵부터 이 땅을 비추는 네온사인 십자가들이 그만큼 이웃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교회 구성원들의 이성의 성숙단계는 예수 탄생 이후(A.D.)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예수 탄생 이전(B.C.)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숱한 십자가들이 이웃사랑을 증거하는가. 우리는 현대를 살면서 정신적·이성적 공백과 퇴보를 오직 물질로 채우고 있는지 모른다. 이성의 회복에 기여하라 우리 조상은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곳간에 먹을거리가 있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 인심이 후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물질은 급속히 풍부해졌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극악해졌다는 것이 올바른 평가가 될 것이다. 이성의 성숙 또한 마찬가지다. 물질과 기계로 현대를 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이성의 성숙단계는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 교회의 개혁이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조찬기도회나 부흥회 차원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부자 되세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따위가 보여주는 ‘물신 우상숭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이 따라야 한다. 실상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물신숭배를 오히려 부추긴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의 장래는 한국사회의 이성과 정신의 건강성 회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좌우될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한편, 촛불시위가 대선을 앞둔 12월7일과 14일에 최정점에 이른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듯, 이번 기도회는 한국사회에 일고 있는 반미의식 고조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노무현 당선이 불러올 개혁과 변화에 대한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권력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거리로 직접 뛰쳐나왔다는 점은 여론 형성과정에서 조선-중앙-동아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노무현의 당선은 젊은 2030세대의 승리, 조중동에 대한 인터넷 매체와 네티즌의 승리라고도 하는데, 지금까지 조중동의 뒤쪽에서 독재자들을 위한 조찬기도회나 부흥회를 통해 편안하게 군림할 수 있던 수구적 교회권력이 직접 거리에 나섰다는 점은 흥미로운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즉, 시민사회에서 몇년 전부터 언론개혁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듯, 지금까지 성역에 머무른 종교계에 대한 개혁 요구가 앞으로 크게 제기될 것이라는 예측을 낳게 한다. 실제로 19일 기도회 한쪽에선 젊은 신앙인들이 한기총에 회개할 것을 요구한 게 그 단초를 보여준 것이다. 이성주의자들은 구약과 신약이 똑같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어법상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 각각 당시 인류 이성의 성숙단계에 맞춘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구약은 당시 인류 이성의 성숙단계가 아직 아동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대하듯 율법으로 말씀하셨다면, 신약은 예수님의 탄생 시기에 인류 이성의 성숙단계가 청소년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청소년을 대하듯 대화를 이끄시고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성주의자들의 해석을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현실에 적용해보는 일은 유익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이성의 성숙단계를 판단하는 데 참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어스름 저녁 무렵부터 이 땅을 비추는 네온사인 십자가들이 그만큼 이웃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교회 구성원들의 이성의 성숙단계는 예수 탄생 이후(A.D.)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예수 탄생 이전(B.C.)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숱한 십자가들이 이웃사랑을 증거하는가. 우리는 현대를 살면서 정신적·이성적 공백과 퇴보를 오직 물질로 채우고 있는지 모른다. 이성의 회복에 기여하라 우리 조상은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곳간에 먹을거리가 있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 인심이 후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물질은 급속히 풍부해졌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극악해졌다는 것이 올바른 평가가 될 것이다. 이성의 성숙 또한 마찬가지다. 물질과 기계로 현대를 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이성의 성숙단계는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 교회의 개혁이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조찬기도회나 부흥회 차원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부자 되세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따위가 보여주는 ‘물신 우상숭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이 따라야 한다. 실상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물신숭배를 오히려 부추긴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의 장래는 한국사회의 이성과 정신의 건강성 회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좌우될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