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어느 돌맹이’는 살아있었다

443
등록 : 2003-01-15 00:00 수정 :

크게 작게

홀연히 사라졌던 유동우씨와의 극적인 만남… 주차관리원들의 노동조합에서 외침은 계속되더라

사진/ 인천시 시설관리공단 노조 간판 앞에 선 유동우 씨. 그는 운동을 잊기 위해 주차관리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70년대 중반에 출판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책이 있었다. 노동자 유동우씨가 ‘요꼬’라 불리던 편물공들의 처참한 현실과 인간답게 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절절하게 기록한 그 수기를 사람들은 단숨에 읽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비로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닐 것이다.

“나는 유동우 최후진술 담당”

81년이던가, 전두환 정권이 막 들어선 살벌한 ‘비합의 시대’에 유동우씨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반국가단체’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힌 적이 있었다. ‘남민전’ 이래 최대의 조직사건이라는 그 재판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이 모두 26명이나 구속 기소되었다. 그 재판을 나는 거의 빠짐없이 방청했는데 ‘사형’을 구형받은 날, 유동우씨는 낭랑한 음성으로 최후진술을 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노동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까지 15년 동안 해온 일은 ‘근로기준법대로 하자’는 주장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져야 할 최저의 기준입니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노동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동안 했던 활동은 단지 인간선언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좀더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극형을 구형하는 이 정권을 저는 솔직히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높고 맑은 목소리로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을 쩌렁쩌렁 울리던 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람이 포승으로 묶인 채 저렇게 당당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최후진술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되풀이해서 외웠다. 신문과 방송에서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던 그 사건 자료집을 어느 종교단체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로 유동우 최후진술 담당이었다. 법정에서 드러내놓고 메모를 하다가는 그 이유만으로 잡혀가 곤욕을 치르는 한심하고 답답한 시대였기에 우리는 한 사람씩 최후진술을 맡아 열심히 외우다가 재판이 끝난 뒤 근처 다방에 몰려가 열심히 적어내곤 했다.


서울·부산·대구·원주 지역에서 노동자 교육 및 조직 활동을 하면서 ‘기독노동자총연맹’의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한 유동우씨는 87년 6월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활동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우리들 곁에서 사라졌다. 그 깊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아직 함부로 말할 때가 아니다. 유동우씨의 종적은 묘연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가끔 그의 안부를 묻곤 했으나 나에게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가 배를 탔다는 둥 외국으로 밀항했다는 둥 소문만 무성했다.

1999년 말께,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주차관리원의 사망을 과로사로 인정받기 위한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증인을 구할 수 없었다. 어느 주차관리원도 회사로부터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려워 증인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문제 소송에서 “노동자쪽 증인이 없다”는 것은 “패소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다. 회사는 무궁무진하게 증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노동자가 증인을 천신만고 끝에 구했다고 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어눌한 말씨와 초라한 행색의 노동자쪽 증인은 한명뿐이고, 빠릿빠릿한 회사쪽 증인은 여러 명이었다면 판사는 그야말로 ‘공정하게’ 회사쪽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발관·양복점, 그리고 요꼬…

소송을 거의 포기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 사망한 주차관리원의 부인이 “증인을 구했다”고 전화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발로 찾아오더니 주차관리원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사망한 동료의 성실한 근무태도에 대해 기꺼이 증언을 해주겠노라고 자청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살았다’ 싶은 느낌이었다. 서둘러 증인을 모시고 올라오라는 약속을 했다. 드디어 어느 날 그 부인이 증인과 함께 우리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나와 연구실장은 일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시 동안 서로 얼굴만 쳐다본 채 아무 말을 못했다. 유동우씨가 바로 그 증인이었던 것이다. “아니, 형님이 어떻게….” 유동우씨도 잠시 동안 아무 말을 못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살았지, 뭐….” 지난한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유동우씨의 얼굴은 여전히 기품이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깊은 눈은 여전했다. 세상 한구석에서 그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유동우(55)씨를 오랜만에 만났다. 우리는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삼원섬유노조는 100% 외국인 투자기업에 결성돼 정상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노동조합이었어. 유신 초기의 정말 어려운 때였지. 73년 12월에 노조를 설립한 뒤부터 해산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수출공단 본부부터 시작해 노동청·경찰·중앙정보부에 보안사까지 엄청나게 불려다니고 조사받고…. 결국 한국노총 섬유노조가 나를 지켜주지 못했지. 섬유노조 지부 사무실에서 나를 제명하는 회의가 끝난 지 한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회사에서 해고되고…. 그 이듬해 8월에 해고된 뒤 복직 싸움도 참 열심히 했어.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김세균 선생이 ‘수기를 한번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서 그 얘기를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던 거야.”

‘요꼬’말고도 유동우씨가 한 일들은 실로 다양하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에는 이발관에도 있었어. 키가 워낙 작아서 어른들 머리를 감기기가 힘이 든 거야. 주인이 참다참다 나중에 ‘너, 좀더 큰 다음에 와야겠다’고 하더군. 종로2가 관철동 ‘평안라사’ 양복점에도 있었지. 공장에서 자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기도 하고…. 천일섬유·유림통상 등을 거치면서 ‘요꼬’ 일을 배웠어. 처음에는 ‘야간함바’를 했지.”

‘야간함바’라는 단어를 이해하려면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읽거나 좀 긴 설명을 들어야 한다. ‘함바’ 대우는 천차만별이었다. 기술 배우게 해준다는 핑계로 밥만 먹여주는가 하면, 아예 밥조차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먼지 자욱한 공장에서 하루 열대여섯 시간씩 일을 하다가 유동우씨는 폐결핵에 걸렸다.

“내 몸에 피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어. 한번 피를 토하면 두 사발씩 나왔으니까…. ‘인간이 태어났다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구나’ 삶에 대한 희망이 없었지. 세코날 28알을 먹고 내가 짠 스웨터들을 덮고 공장바닥에 누웠는데…. 어머니가 그날따라 새벽기도 끝내고 내가 그렇게 보고 싶더래. 중량동에서 면목동까지 새벽길을 걸어오신 어머니가 나를 찾았고, 동료들이 나를 깨웠는데 안 일어나니까…. 그때 한달 동안 신세졌던 병원에 치료비 한푼 못 냈는데 그 은혜를 아직도 못 갚았어.”

주차관리원들의 고용관행을 바꾸다

그의 어릴 적 고생하던 이야기 중에 중요한 대목만 추려도 이 원고가 차고 넘친다. 제한된 원고 20매가 원망스럽다.

“주차관리원 하시기 전까지는 어떻게 사셨어요” 내 물음에 유동우씨는 답했다. “소래포구에 가서 배를 탔지(아, 그가 배를 탔다는 것은 공연한 소문이 아니었다). 꽃게도 잡고 새우도 잡고…. 몇 개월 동안 고생만 했지 돈 한푼 못 벌었어.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도 했지. 오래전, 경찰들을 피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다 골절됐던 왼쪽발 때문에 많이 힘들더라고…. 광고지 보고 찾아간 여관에서 청소일도 한 3년 했어.” 나는 가슴이 막혀서 더 이상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금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에 못지않은 지도력으로 한때 우리 운동 전체를 이끈 대선배가 그렇게 살았던 거다.

유동우씨는 현재 주차관리원들로 조직된 시설관리공단노동조합의 위원장이다. “운동은 완전히 잊어버리자 마음먹고 배를 타러 갔던 연장선상에서 주차관리원 일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노조위원장이 된 뒤 “출근해서 배치표 아래 ‘고용해지자 명단’에 포함되면 그날로 해고되는 것으로 알고 돌아가던” 주차관리원들의 고용관행은 사라졌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이 회사에 모두 543명이 취업했는데 정상적으로 퇴직한 사람은 18명뿐이고 305명이 징계해고를 당했어.” 그런 일을 그냥 두고 봤을 유동우씨가 아니다. 새해라는 단순한 시기적 구분이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역사의 강물은 유동우씨처럼 그렇게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작은 돌멩이’들에 의해 흘러갈 것이다.

하종강|한울노동자문제연구소장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