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음은 그 자체로 병이다.”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의 극작가 테렌티우스의 말이다. 혹 이 말이 어르신들 귀에는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크고 작은 신체적 장애가 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고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넓게 보아 이미 사십대 중반의 갱년기를 넘기면서 누구에게나 오는 현상이다. 일상적인 간단한 예로, 원시가 된다든가, 치아가 약해진다든가, 특히 노인들이 높은 계단을 빨리 오를 수 없다든가, 귀가 잘 안 들려서 자신도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든가,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 등은 모두 신체적 장애다. 노인들에게 “당신들도 젊은이처럼 할 수 있다”는 헛된 자존심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핸디캡’을 사회가 나누어 가져야 한다. 우리가 장애인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는 것은 그들의 인권을 위해서다. 건강한 사람과 동등하게 그를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태도이다. 늙음이라는 신체적 장애를 느끼는 노인들에 대한 배려도 그들의 인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르신을 잘 모시는 것을 효도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효의 전통을 현대사회 젊은이들에게 이어가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한편으론 효도의 정신을 가정의 테두리 안에만 놓아두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를 가정 밖의 사회적 맥락에만 놓아두기 때문이다. 정치적 ‘인권 개념’에서 벗어나… 노부모에 대한 효도가 좀더 보편적 차원을 획득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세대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필자는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에는 열심인 젊은이가 자립능력이 없는 병약한 노부모 모시기를 거부하며, 효도의 시대착오적 측면을 적극 비판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렇게 인권의 사각지대는 가정 안에도 있을 수 있다.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노부모를 잘 모시는 것은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 인권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 존중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사람의 인권은 그것이 누구의 인권이든 언제 어디서든 존중되어야 한다. 인권은 그 어느 때보다 21세기 ‘시대의 화두’다. 이제 인권을 정치적 맥락에서만 보고자 하는 20세기적 사고에서 벗어나, 경제(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변화자본과 인간’이란 주제로 경제적 인권을 언급한 바 있다), 사회, 문화 등 다차원적 고려의 대상으로 확대할 때, 한 나라의 인권은 신장되며 인권 국가로서 모범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권 문제를 독창적이고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국제적 위치에 설 수도 있다. 김용석/ 전 로마 그레고리안대 교수·철학 uchronia@netsg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