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의 사회주의
등록 : 2003-01-15 00:00 수정 :
“정부 체계로서 공산주의는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고 체계로 공산주의의 미래는 확고해보인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마르크스의 지적 유산-공산주의 이후의 마르크스’라는 기사에서 내린 평가입니다.
“옛 소련이 몰락하면서 평등, 착취로부터의 자유, 진정한 정의라는 공산주의 이상은 쓴웃음만 낳았다. 소련과 동구권에서 마르크스의 동상은 레닌·스탈린의 동상처럼 경멸을 받았으며 공산주의는 이론뿐 아니라 실천적인 면에서도 부정을 당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체제에서 살면서도 잘못됐다고 여기지 않는 서구인은 생각을 달리한다. 마르크스는 많은 오해를 받았으며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을 왜곡했다. 마르크스가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봤더라면 서구인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오류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적은 많은 부분에서 옳았으며 마르크스는 여전히 존중받을 만하다.”
이에 앞서 세기말인 1999년 영국의 공영
은 밀레니엄의 인물을 뽑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시민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마르크스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경합자였고, 뉴턴과 다윈이 각각 3위, 4위에 올랐습니다.
은 “비록 20세기의 독재정권들이 마르크스의 이념을 왜곡했지만, 철학자·사회과학자·역사가·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는 오늘날 학자·연구가들에게 존경받고 있다”고 해설했습니다.
오늘날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는 ‘정부의 체계’라기보다는 이처럼 ‘사고의 체계’입니다. 몰락한 옛 소련, 피폐한 북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아이디어입니다.
한국에서는 다릅니다. 좌파적이라고, 사회주의적이라고 했을 때 ‘사고의 체계’보다 ‘정부의 체계’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지구상 유일하게 냉전이 끝나지 않은 곳에서 좌익은 급진혁명=공산정권의 연상작용을 일으킵니다. 난리, 친북의 함의가 있습니다.
대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 간부가 해외언론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목표는 사회주의”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돼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인수위의 재벌정책은 집단소송제, 상속증여세 포괄주의, 금융회사 계열분리청구제 등입니다. 총수의 편법적 전횡을 막고 방만한 경영과 지나친 집중을 규제하자는 것입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꼭 필요하다고 여긴 조처들입니다.
굳이 사회주의적이라고 갖다붙일 만한 내용도 없습니다.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여 시장경제를 잘 굴러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서구처럼 진짜 사회주의 논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경련이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은 조처를 ‘사회주의=급진혁명’으로 덧칠하려 했다면, 개혁의 필요성을 스스로 확인시켜준 셈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