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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감성세대의 ‘문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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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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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화두로 삼아 일상적 연대·소통 실현… 그들은 새로운 정치문화의 주체로 나설 건가

사진/ 젊은 세대들이 대한민국의 주류를 바꿔가고 있다. 이들은 90년대의 감수성을 토대로 6월의 붉은악마, 12월의 촛불시위대를 거쳐 새로운 '시민'으로 거듭났다. (김종수 기자)
2002 대선 직전에는 ‘세대 대결’이, 그 이후에는 ‘세대 혁명’이란 말이 온갖 매체를 수놓았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무장한 20대의 결집력은 디지털 세대가 아날로그 세대를 물리쳤다는 말로 이어졌다. 이번 대선에 세대론이란 틀을 들이대는 게 틀린 건 아닐 테지만 어딘가 부족해보인다. 중앙선관위의 투표율 집계와 한국방송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투표율은 47.5%에 불과하다. 노무현과 이회창에 대한 선택 비율이 3 대 1 정도로 압도적 경향성을 보였지만, 85.1%로 최고의 투표율을 보인 40대의 선택 비율이 1 대 1로 거의 대등했고, 50대 이상의 경우도 4 대 6 정도로 나뉜 것과 비교해보면 그리 대단한 수치가 아니다. 실제로 유권자 수, 투표율, 후보별 득표율을 종합해 계산해보면, 20대 유권자 중 노 후보를 찍은 수는 대략 240여만명이지만, 40대는 300여만명, 50대는 320여만명으로 20대의 비중을 훌쩍 넘어선다. 30대에선 350여만표 정도가 나왔다. 결국 모든 세대의 고른 지지가 노 후보 당선을 가능하게 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정몽준의 지지철회라는 직격탄을 맞고도 ‘바보 노무현’을 최후의 승자로 올려세운 사건에 어울리는 말은 ‘2030의 혁명’이라기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확실히 달라졌다’가 아닐까.

월드컵에서 촛불시위, 대선까지

20대가 돋보이는 건 조금씩 변화해왔을 사람들의 의식을, 감수성을 새로운 현상으로 가시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성세대’라는 지칭에서 드러나듯 기성세대와 달리 비규율적으로 주체화된 이들의 존재는 월드컵 열풍에서, 인터넷에서 출발해 거리로 쏟아져나온 촛불시위대에서, 그리고 대선에서 뚜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성세대는 당당히 자신을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방식에 열렬히 호응했다. 6월의 붉은악마에, 12월의 촛불시위대에 비난을 퍼붓는 ‘어른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었던가.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하며 80년대의 대표적 이론가로 활약하다 지금은 탈근대의 사유를 탐색 중인 이진경씨의 진단이다.


“흐름으로 존재하는 대중은 몰적이며 분자적이다. 1몰에 존재하는 6×10##23개만큼의 기체는 각자 독립적이지만 흐름으로 보면 늘 같이 움직인다. 기존 제도화된 통로들, 홈들을 따라 흐르는 이 몰적인 선분이 어느 순간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팬 홈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쁘고 즐겁다는 걸 알아버린 20대가 앞장섰고, 40·50대의 기성세대가 여기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 전염과 감염의 속도가 커지면서 장마 때 계곡이 순식간에 흘러넘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씨의 표현은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질 들뢰즈’식의 말하기다. 들뢰즈는 존재를 생성하고 주름지는 끊임없는 운동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흐름, 몰적, 분자적, 전염, 감염 등은 기존 형이상학과 달리 존재의 운동성·역동성을 느끼게 해주는 낱말들이다. 이런 개념은 20대가 보여주는 새로운 감성을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 좀더 낯익은 사회과학적 말하기로 바꿔보자. 20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주체들, 그리고 여기에 다수가 호응해주는 기성세대의 변화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조한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거대담론 무너지자 일상에 주목한 세대

“단순한 구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욕망·이미지·감수성이 중요한 시대다. 이제 단순한 논리는 지루하고 대중은 그런 논리로 후기 근대적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새로운 문법을 가진 주체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적어도 단일 민족, 단일한 주체, 단일한 거대담론과는 결별하고 싶어한다. 개인을 중심으로 삶을 재구성해가는 일에 관심을 갖는, 자신의 일상을 일구고, 개성을 살려가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이런 새로운 주체가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졌을 리 없고, 기성세대의 변화 역시 어느 한순간 일어났을 리 없다.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90년대 이후 거대담론이 무너지면서 변혁 진영은 그람시의 진지론, 푸코·들뢰즈·보드리야르 등이 다양하게 제시하는 탈근대론적 방법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에 <르몽드>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유령이 떠돌고 있다’며 대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현상이 국지적으로 재현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체에 대한 논란으로 분분했지만, 일부에선 ‘일상’, ‘욕망’에 주목한 이 사유체계의 유용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91년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사회과학>(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지은 소장학자 김성기씨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눈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볼 경우 의외의 정치변혁적 전망도 기대할 수 있겠다”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와 접점을 확인하려 들었다. “이성·주체·진화·발전을 전제로 하는 근대의 논리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동안 문화는 사회적 부대 현상으로서 위축되거나 거꾸로 지나친 자율성을 부여받곤 했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실제 자리하는 곳은 경제도 이데올로기도 아니며 오히려 일상과 욕망의 차원이다.”

‘구체적’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은 나날의 일상적·문화적 삶이었다. 이런 인식이 새삼스러웠던 건 중앙에 조직된 정치집단이 개개인의 욕망을 대변할 수 없다는 ‘체념’과 무관하지 않았다. 노동현장을 응시하던 시선의 일부는 방송·영화 등 문화현장으로 쏠렸고, 80년대라는 의식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일상에서의 혁명을 꿈꾸며 ‘문화일꾼’으로 나섰다. 대중문화는 바야흐로 발흥하기 시작했고, 이른바 서태지 세대는 대중문화의 기운을 흠뻑 받으며 자신들만의 감수성을 키우고 즐기면서 신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이들은 체 게바라 티셔츠를 즐겨 입으면서도 사회주의 이념에 연연하지 않고, 태극기 패션을 즐기면서 국수주의의 혐의를 풍기지 않는 비규율화된 존재가 됐다.

문화현장에서 우뚝… 진보의 지평 넓혀

사진/ 새로 형성된 시민들의 욕망은 대선이라는 정치공간에서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냈다. (류우종 기자)
일상을 지배하는 욕망의 정치지형도에서 진보진영이 주도권을 잡아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졌다. CF조차 ‘나는 나!’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욕망을 당당히 드러내고 즐기라고 ‘선동’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전의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에 기반한 고통스러운 절제와 금욕으로 축적을 진행시켜왔다. 가령, 금주법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과잉생산은 대공황을 낳았고 자본주의는 그때까지의 조절체제를 바꿨다. 국가나 자본이 나서서 욕망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이 그런 것 아닌가. 한국에선 87년 전후로 달라졌다. 욕망을 억압하기보다 끊임없이 자극하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이진경)

붉은악마, 촛불시위, 대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문화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 건 이쯤에서가 아닐까. 진보진영이 문화운동이란 이름으로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조금씩 잡아갔고, 대중문화의 세기가 활짝 열린 90년대를 누빈 N세대는 완벽히 분자적 다중(계급이나 민중이 아닌)으로 성장하다 그들이 재미있다고, 신난다고 느끼는 사안을 만나면 순식간에 세력화한다. 월드컵 열풍과 같은 비정치적 축제를 만나 존재감을 과시한 이들은 반미라는 정치적 사안을 만나 촛불시위로 그 정체성을 재확인하더니 대선에서도 맘껏 놀아버렸다. 이들의 속성은 당연히 보수와는 잘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보수가 보기에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회창 후보의 정치철학과 국정비전을 담은 책 <미래를 여는 창>을 대표 집필한 공성진 한양대 교수는 12월26일 방송된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20대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세대는 어딘가 비정상적이다.” 이날 김현일 <중앙일보> 논설위원도 비슷한 논리에서 “(그들이 선택한) 대선 결과도 어딘가 비정상적이다”라고 되풀이 말했다.

자기 욕망에 떳떳하라고 텔레비전을 통해, 노래를 통해, 영화를 통해 숱한 암시를 받아온 기성세대의 감수성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들은 북핵 위기, 색깔론, 지역주의 등 수구세력이 틀잡아준 욕망의 통로 대신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을 선택했다(특히 충청도와 강원 북부 지역의 ‘변신’은 여기에 딱 들어맞지 않는가).

공존의 미덕 터득해 ‘먹잇감’ 찾는다

욕망의 정치지형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욕망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일부에선 ‘의식 있는’ 30대가 10대, 20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지도론’을 조심스레 꺼낸다. 그러나 이진경씨는 단호하게 ‘지도론’을 비판한다. “조직화라는 예전에 실패한 틀을 가지고 30대가 달려드는 순간 새로운 대중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대중운동은 언제든 다시 튀어나올 수 있는 포텐셜(잠재력) 준위로 존재한다. 비정치적으로 흐르는 대중의 욕망이 정치적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더욱 확장해야 한다. 예컨대 반미라는 지금의 움직임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반전의 문제로 더욱 넓고 깊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옳다/그르다’보다 ‘좋다/싫다’라는 기준으로 살아가는 세대에게서 서로 배타적으로 갈라질 수 있는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감지하지만 동시에 다른 차이들을 인정하면서 연대와 소통을 가능케 하는 장점을 읽을 수 있다. 사이버 공간을 통한 담론의 형성과 유통에 재미를 느낀 이들은 지금 또 다른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도움말 주신 분들=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전효관 하자센터 부소장, 고미숙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홍성태 상지대 사회학과 교수, 이동연 문화연대 사무차장.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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