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는 끝났다.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것을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리더십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보다 더 기쁠 순 없다. 그야말로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출렁인다’이다.
투표함이 ‘체육관’을 나온 이래 네번의 대통령 선거들 가운데 이번만큼 대중이 선거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 대중이 정치를 당하지만 않고 이번에는 정치를 했다. 한 마이너리그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어젠다 설정’의 상당부분을 대중이 했다.
우리에겐 ‘평가의 훈련’이 부족하다
나는 행복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신치하의 군대식 교실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감자로 끼니를 대신하는 경험도 했으며, 전시에 비명횡사한 유령들 사이에서 잠자느라 유난히 귀신꿈을 많이 꾸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모든 게 나아졌다. 나라가 잘살게 되고, 전쟁의 기억은 잊히고 있으며, 정치도 점점 나아진다. 군사정권 30년 동안 유예됐다 뒤늦게 가동하고 있는 정치민주화 공정에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수순이다. 게다가 최근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나. 바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마이너가 메이저를 극복한 사건이었다. 작은 언론들이 공룡 언론들을 이기고, 재벌의 뭉칫돈을 돼지저금통이 이기고, 특권을 세습해온 명문세가를 한 풍운아의 입지전이 이긴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누군가 축제의 기분을 맛보았다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권위를 자랑하던 앙시앵레짐, 그 구질서가 내부로부터 구시렁구시렁 와해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자, 이제 잔치는 끝났다. 정치가 축제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것을 지키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의 대통령 당선자가 불과 서너달 전에 겪은 일이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쥐들이 먼저 소란스러워진다고 하던가. 그것이 한국정치판에서 보고 배운 정치인들의 한계였다고 한다면 할말 없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리더십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가령, 내가 몸담았던 한겨레신문에서도 경험한 것이지만(한겨레는 사장과 편집국장을 직선으로 선출한다), 사람들이 선거과정에 열광하는 데 비하면 선거 이후에는 너무 무심해지며, 선거 결과에 환호하는 것에 비하면 애정이 너무 빨리 식어버린다. 내 경우도 후보를 선택할 때는, 그가 금방망이를 갖고 있어서 모든 현안을 단박에 해결해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러다 금세 불평불만투성이가 돼버린다. 물론 환상을 부추긴 공약남발에도 책임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리더쉽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훈련이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다. DJ도 지금 공과가 공정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내 느낌이다. 1997년, 그가 몇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난을 치른 뒤 마침내 대통령이 됐을 때 나도 열광했었다. 그때는 그가 스타덤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굴러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남북관계와 경제회복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몇개의 권력형 비리사건들이 그의 공과를 같은 포대에 쓸어담아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린 것이다. 나는 우리가, 각각의 사안마다 경중을 따지고 본질을 파악해 정확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성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적대적인 언론들의 보도가 대차대조표 작성에 필요한 객관적 정보와 냉정한 판단을 방해했다. 사회적 지능을 높여라 우리 사회가 리더십에 대한 훈련이 부실한 이유는 뭘까. 물론 군사정권과 냉전시대,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이다. 군사정권이 국민에게서 시민권을 잠정적으로 몰수해감으로써 대중은 정치적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압제의 그늘에서, 기성세대는 무조건 ‘YES’라고 말하는 버릇을 들였고 젊은 세대는 ‘NO’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해서 구세대는 권력에 대한 피해의식을, 신세대는 권위에 대한 극단적인 알레르기를 갖게 됐는데, 그 결과로 긍정적 권위와 부정적 권위를 분간 못하게 되긴 양쪽 다 마찬가지다.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가 어떤 칼럼에서, 신뢰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능력을 사회적 지능이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사회적 지능을 좀더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신뢰의 대상이 어떤 정보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 어떤 후보를 선택했건 이제 대중에게 남은 일은 리더십에 대한 관용과 비판의 기준을 갖추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정치권력에 대한 엄정한 심판관, 최선의 파트너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경제의 고속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정치의 중세를 살았다. 이제 정치가 속도를 따라잡아야 할 순서다.

사진/ 조선희ㅣ소설가(한겨레)
나는 행복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신치하의 군대식 교실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감자로 끼니를 대신하는 경험도 했으며, 전시에 비명횡사한 유령들 사이에서 잠자느라 유난히 귀신꿈을 많이 꾸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모든 게 나아졌다. 나라가 잘살게 되고, 전쟁의 기억은 잊히고 있으며, 정치도 점점 나아진다. 군사정권 30년 동안 유예됐다 뒤늦게 가동하고 있는 정치민주화 공정에서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수순이다. 게다가 최근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나. 바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마이너가 메이저를 극복한 사건이었다. 작은 언론들이 공룡 언론들을 이기고, 재벌의 뭉칫돈을 돼지저금통이 이기고, 특권을 세습해온 명문세가를 한 풍운아의 입지전이 이긴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누군가 축제의 기분을 맛보았다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권위를 자랑하던 앙시앵레짐, 그 구질서가 내부로부터 구시렁구시렁 와해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자, 이제 잔치는 끝났다. 정치가 축제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그것을 지키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의 대통령 당선자가 불과 서너달 전에 겪은 일이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쥐들이 먼저 소란스러워진다고 하던가. 그것이 한국정치판에서 보고 배운 정치인들의 한계였다고 한다면 할말 없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리더십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가령, 내가 몸담았던 한겨레신문에서도 경험한 것이지만(한겨레는 사장과 편집국장을 직선으로 선출한다), 사람들이 선거과정에 열광하는 데 비하면 선거 이후에는 너무 무심해지며, 선거 결과에 환호하는 것에 비하면 애정이 너무 빨리 식어버린다. 내 경우도 후보를 선택할 때는, 그가 금방망이를 갖고 있어서 모든 현안을 단박에 해결해줄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그러다 금세 불평불만투성이가 돼버린다. 물론 환상을 부추긴 공약남발에도 책임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리더쉽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훈련이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다. DJ도 지금 공과가 공정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내 느낌이다. 1997년, 그가 몇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난을 치른 뒤 마침내 대통령이 됐을 때 나도 열광했었다. 그때는 그가 스타덤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굴러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남북관계와 경제회복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몇개의 권력형 비리사건들이 그의 공과를 같은 포대에 쓸어담아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린 것이다. 나는 우리가, 각각의 사안마다 경중을 따지고 본질을 파악해 정확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성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적대적인 언론들의 보도가 대차대조표 작성에 필요한 객관적 정보와 냉정한 판단을 방해했다. 사회적 지능을 높여라 우리 사회가 리더십에 대한 훈련이 부실한 이유는 뭘까. 물론 군사정권과 냉전시대,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이다. 군사정권이 국민에게서 시민권을 잠정적으로 몰수해감으로써 대중은 정치적 선택을 하고 판단을 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압제의 그늘에서, 기성세대는 무조건 ‘YES’라고 말하는 버릇을 들였고 젊은 세대는 ‘NO’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해서 구세대는 권력에 대한 피해의식을, 신세대는 권위에 대한 극단적인 알레르기를 갖게 됐는데, 그 결과로 긍정적 권위와 부정적 권위를 분간 못하게 되긴 양쪽 다 마찬가지다.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가 어떤 칼럼에서, 신뢰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능력을 사회적 지능이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사회적 지능을 좀더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신뢰의 대상이 어떤 정보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 어떤 후보를 선택했건 이제 대중에게 남은 일은 리더십에 대한 관용과 비판의 기준을 갖추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정치권력에 대한 엄정한 심판관, 최선의 파트너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경제의 고속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정치의 중세를 살았다. 이제 정치가 속도를 따라잡아야 할 순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