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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국정원이 흔든 송두율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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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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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에 국정원 직원이 압력 넣어…삭제된 협박 장면 복원해 다시 상영하기로

사진/ 강석필 프로듀서(맨 오른쪽)에게 회유와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의 모습이 몰래카메라에 잡혔다.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일상적 행위조차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경계도시>는 비장한 어투의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홍형숙 감독과 프로듀서이자 감독의 남편인 강석필씨의 ‘결단’은 국가정보원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이들은 자신들을 회유 또는 ‘위협’하는 국가정보원 직원 2명을 ‘조연’으로 출연시켰다. 이른바 몰래카메라에 국가정보기관의 ‘작업’ 장면이 생생히 잡힌 것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1년 가까이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 후반작업을 하던 지난해 8월28일의 일이다. 강석필 프로듀서는 이영식이라고 밝힌 국정원 직원의 전화를 받고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이영식이라는 인물과 함께 나온 또 다른 직원이 말을 꺼냈다.

“그게 빨갱이들의 기본 전략이야”


사진/ <경계도시>의 홍형숙 감독.
“이 영화가 파급효과가 큽니다, 그렇죠 이게 무슨 책이나 그런 거하고 다르지 않아요 틀림없이 송 교수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원이라는 것을, 우린 이에 대한 근거가 있어요. 국가보안법에 보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찬양고무하고 만나서 회합하고 통신연락하고 그러면 그 사람도 처벌을 받게끔 돼 있습니다. 그 선상에 강 감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셔야 합니다.”

국정원 직원들은 자기네들이 법적으로 문제삼으면 영화는 폐기처분되며 제작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에게 법적 책임이 돌아갈 수 있다고 충고했다. 이 정도에서 멈췄다면 ‘법적 조언’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이들은 속내를 좀더 솔직히 드러냈다.

“(제작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만들되 이적성만 없게끔 만들라는 그 얘기지. ‘지금 국내에 못 들어오고 있다’ 이렇게 동정심을 자아내면 결국 그 사람에 동조하게 되고, 그런 활동을 강화하는 결과가 돼버린다고. 그게 송 교수가 노리는 전술이지. 동조세력 확보하는 거 그게 또 빨갱이들의 기본적인 전략 아닙니까.”

그런데 5일 전인 8월23일 서울지법은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판결을 내린 터였다. 송 교수는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 출신 황장엽씨가 <북한의 진실과 허위>란 책에서 자신을 김철수란 가명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지목하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황씨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재판부의 판단은 이랬다. “송 교수가 김일성 북한 주석을 면담하고 몇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비교적 북한과 관계가 밀접한 친북 성향의 사람이란 점이 입증될 수 있을 뿐 김철수란 가명 아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

몰카 장면 넣어 비밀리 완성했으나

사진/ 30여년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경계도시>의 포스터.
강 프로듀서는 이런 판결을 들어 문제없는 것 아니냐며 반박했다. 국정원 직원은 뜻밖의 말을 했다.

“증거가 미흡하다는 것이지 아니라는 건 아니예요. 우리는 민사소송 그런 거하고 관계 없이 뭔가를 갖고 있어요. 그걸 밝히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서 안 밝힙니다. 수사 기술적인 문제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안 밝힐 뿐이지, 들어오면 법원에 영장신청해서 구속집행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고는 타이르듯 결론을 내렸다. “많은 잠 못 이루는 밤을 고민해야 될 거예요. 그러고 나서 어떤 결심이 서지, 안 그러면 그거(충고에 대한 이행) 하겠습니까”

이런 대화장면이 생생히 담긴 ‘몰카’ 장면은 작품의 초반, 중반, 후반 등에 나눠 실려 있다. <경계도시>가 처음 국내에 공개된 건 지난 11월 중순에 열린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그러나 그때는 몰카 장면이 빠져 있었다. 이건 <경계도시>가 국정원의 직간접 개입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온 배경과 관련이 있다. 지난해 7월 제작진은 문화관광부쪽에서 “국정원이 민감해하는 것 같다”며 이 영화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내용과 진척 상황에 대한 정보를 취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 8월 중순께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위원장인 유길촌씨가 홍 감독과 강 프로듀서를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유 전 위원장은 작품을 만들면 미리 보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이를 사전심의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경계도시>는 영진위가 선정해 지원하는 ‘독립영화 제작지원’ 작품으로 뽑힌 상태였다. 유 전 위원장은 “공모 기한이 지났는데도 뜻있는 작품이라 지원하기로 한 작품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대상으로 정한 동백림 사건 관련자 가운데 고등학교 은사가 있어 육성이라도 듣고 싶어 그런 것이다. 국정원에서 어떤 연락이나 문의는 없었고, 이후 이 작품에 대해 보고받은 적도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강 프로듀서는 유 전 위원장과 만난 지 일주일이 채 안 돼 국정원 관계자를 대면하게 됐다. 제작진은 이런 일련의 상황을 작품에 대한 외부 압력으로 받아들였다.

사진/ <경계도시>의 겅석필 프로듀서.
긴장한 제작진이 몰카 장면을 넣고 편집한 작품을 ‘비밀리’에 완성했으나 또 다른 어려움에 부닥쳤다. 부산국제영화제쪽에서 이 작품의 상영을 바라나 국정원 부분이 민감해 자칫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해왔다. 문제 장면을 빼지 않으면 상영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건 아니지만 제작진은 고민 끝에 몰카 장면을 뺐다. 영화를 만든 이상 대중에게 보여야 하고, 국내외 눈길이 집중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며,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이 국정원을 향해 도청공세를 펴던 터라 자칫 이 사안이 왜곡된 형태로 비화될 수 있다는 등의 ‘정치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영화제에서 성공리에 상영을 마치기는 했으나 이후 제작진은 고민에 빠졌다. ‘이럴려면 다큐멘터리를 왜 만들었을까’라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강 프로듀서는 “애초 녹음만 하려다 녹화까지 하게 된 장면이지만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서 집어넣었는데 그걸 빼버린 것에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결국 다시 넣기로 결심했다.”

국정원의 입김은 강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만든 <경계도시> 최종판은 서울독립영화제가 열리는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12월25일 오후 4시 상영한다. <경계도시>는 30년 넘게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 학자의 비극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다. 문화관광부·영화진흥위원회·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은 이 작품과 관련해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압력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단 한 차례의 ‘법적 조언’과 ‘그림자’만으로도 제작진과 작품, 영화제 등을 오그라들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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