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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직격 최루탄, 그리고 카드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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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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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올 때마다 생각나는 여인, 전국여성노동조합 조직국장 박남희씨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난타당해 심장막 내출혈로 죽은 뒤 몇 개월 동안,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 곁을 떠났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그때 우리 가슴에 묻어야 했던 이름들은 미처 다 헤아릴 수도 없다. 그해 가을 어느 날, 한 여성 노동자가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해 봄, 날마다 몇 차례씩 열리는 시위에 나갔다가 시청 뒷골목에서 직격 최루탄을 맞아 화상을 입고 이제 겨우 회복됐는데,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을 혼자 해보려고 하니 그 일을 좀 도와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도와야지, 그게 내 일인데….

아하, 이 노동자는 날 무시하는구나…

그 뒤 꽤 오랫동안 그 노동자를 만났지만 나는 그가 웃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었지만 농담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는 짬을 도무지 내주지 않아 억지로 웃겨볼 수도 없었다. “아, ‘곁을 내주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거로구나.” 책상머리를 지키고 앉아 노동상담이란 걸 하면서 ‘생각대로 올곧게 살아가지 못하는 지식인’이라는 자격지심이 있는 내가, 치열하게 사는 노동자를 만날 때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열등감 때문이겠지만 ‘아하, 이 노동자는 나를 무시하는구나’라고 결론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은 계속 진행돼 띄엄띄엄 만났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증인’ 문제가 벽에 부닥쳤다. 최루탄이 직격으로 날아와 그의 가슴에 맞고 터졌다는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증인이 없으면 정부를 대리해 소송을 진행하는 검사는 “주장만 있지 입증이 없다”고 버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던 그 순간, 사람들이 시청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자가용을 세워 그를 태우고 황급히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떠날 무렵, 어떤 젊은 여성이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그가 기억해냈다.

“내가 모두 봤어요. 혹시 나중에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나사청’으로 연락하세요. 나사청이에요, 나사청…. 세 글자를 꼭 기억하세요.”

‘나사청’은 ‘나라사랑청년회’의 줄임말이다. 우리는 ‘나사청’에 연락을 했다. “1년 전쯤 모월 모일 모시에 시청 뒷골목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직접 본 사람을 찾노라”고…. 며칠 뒤 ‘나사청’에서 드디어 ‘사람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가 ‘나사청’ 회원과 함께 증인신문을 준비하러 내 사무실로 왔다. 긴 생머리에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을 한 아주 좋은 인상의 여성이었는데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했다. 증인의 도움으로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와 맞선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받은 배상금 가운데 꽤 많은 금액을 자신이 속한 노동단체에 기부했다.

그해 연말 성탄절 무렵, 나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한장 받았다. 그 노동자가 우편엽서 뒷면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려, 다시 편지봉투에 넣어 보낸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말보다는 노동자로서, 이 땅 민중의 자식으로서 더 열심히 사는 것이 진실로 고마움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엽서는 오늘 하루를 꼬박 들여 만든 겁니다.”

아, 그랬구나. 나를 무시하거나 싫어한 것은 아니었구나. 화상으로 흉하게 얼룩진 가슴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헤픈 웃음을 기대했다니…. 나는 참 부끄러웠다.

카드를 받은 날 오후,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카드 잘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만들었다는 거요. 참 고맙습니다.” 나의 인사치레를 듣더니 그가 말했다. “아, 그거요 다른 카드까지 다 만드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는 뜻이에요.” “그래 난 또 내 카드 하나 만드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는 줄 알고 괜히 좋아했잖아.” 내 말을 듣고 그가 까르르 웃었는데, 그를 알고 난 뒤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매 맞는 것이 운동인 줄 알았던 시절

사진/ (김종수 기자)
10년 전에 크리스마스 카드 한장으로 나를 크게 감동시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꼭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바로 박남희(40)씨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 10년 전에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 얘기를 꺼냈더니 내게 묻는다. “도대체 내가 그 카드에 뭐라고 썼어요” 카드에 써 있는 문장을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자 박남희씨는 거의 뒤집어지면서 웃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 썼단 말이에요 요즘 같으면 그런 거창한 표현 함부로 쓰지 않을 텐데. 까르르….”

우리는 20년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갔다. “그날이 아마 2차 범국민대회 ‘백골단 철폐의 날’이었을 거예요. 현장 친구들과 조를 편성해서 나갔어요. 나이 어린 남자 노동자의 손을 꼭 잡고 다녔는데, 시청앞 중심에 있다가 그 무렵 시위진압에 물대포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잖아요…. 물대포에 계속 뒤로 밀려서 사람들이 몇명 안 남았어요. 갑자기 빨갛고 동그란 게 띠익 날아오더니 가슴에 정통으로 맞고 터지는 거예요.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도 ‘저 어린 친구가 맞지 않아 참 다행이다. 엄마한테는 연락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봉제노동자인 박남희씨가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이라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은 ‘톰보이’ 상표 옷을 만드는 구로공단의 ‘성도섬유’였다.

“85년이었나, 불순분자로 몰려 11명이 해고당했는데, 그때는 날마다 회사에 출근투쟁하러 가서 매맞는 것밖에 몰랐어요. 옛날에는 매맞는 것이 운동인 줄 알았다니까요. 성도섬유에서 해고된 뒤에도 구로공단에 있는 회사 서너곳을 더 다녔는데, 다니는 회사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이 발각되면 하루 종일 얻어터졌어요. 거, 왜 정해진 코스 있잖아요. 회사에 출근하면 남자들 몇명이 달려들어 달랑 들어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둬놓고, 제 발로 나가라고 하면서 주로 머리만 때리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누가 알겠어요. 그러다가 사람들 퇴근하면 떼거지로 달려들어 두들겨패고, 차에 태워 먼 쓰레기장에 내다버리고…. 그때는 왜 그걸 다 참고 살았는지 몰라.”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안에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다니다가 생산과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는 시절이었다. 폭압에 눌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여성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노동운동’을 포기했다면 지금 이만큼 당당한 우리의 모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로공단의 큰 회사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지면서 독산동의 작은 회사에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미팅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이 나중에 산악회로 발전했어요.”

노동자로보다 여성으로 살기가 더 힘들다

산악회가 중심이 돼 ‘옷만사’가 탄생했고, ‘옷만사’는 몇년 뒤 청계피복노동조합과 함께 ‘서울의류제조업노동조합’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다.

89년부터 92년까지 ‘옷만사’를 대표하는 위원장으로 열심히 일한 박남희씨는 그 뒤 ‘서울여성노동자회’ 실무자를 거쳐 지금 ‘전국여성노동조합’ 조직국장을 맡고 있다.

“87년에 여성노동자회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나도 비웃은 사람이었어요. ‘하찮은 일에 왜 저렇게 훌륭한 선배들이 매달릴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다가 서른을 넘기면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보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93년에 내가 직접 찾아가서 여성노동자회에 가입했고, 95년부터는 실무자로 일했어요.”

박남희씨가 있는 전국여성노동조합(http://kwunion.jinbo.net)은 “일하는 여성이면 업종과 나이, 성별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곳”이다.

“여성 노동자 4명 가운데 3명이 비정규직이고, 종업원 10명 미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70%예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조는 필연이에요. 여성들의 고용조건과 현실에 가장 걸맞은 형태의 조직으로 만들어졌어요. 학교에서 일하는 도서관사서·영양사·조리사·과학조교, 호텔 룸메이드, 학원강사, 미화원, 파견직 여사무원, 공부방 교사…. 우리 구성원들은 정말 다양해요. 누구든지 가입만 하면 함께 활동할 수 있어요. 여러분, 살맛나는 일터를 만드는 전국여성노동조합으로 오세요!”

박남희씨는 그 일을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할 거예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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