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정치적 지혜

439
등록 : 2002-12-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이번 대통령 선거는 새롭게 조성된 정치환경을 확인시켰다. 인터넷이 정치토론장으로 활용되고 대선유권자연대의 선거자금 감시활동도 이뤄졌다. 게다가 진보진영 후보가 TV토론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변화의 밑바탕에는 냉전체제 붕괴와 민주화라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이 있다.

사진/ 김대영ㅣ민주사회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박승화 기자)
2002년 대통령 선거 대단원의 막이 내리고 결과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우리에게는 결정권이 없고, 단지 선출된 대통령이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 국정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며 비판할 수 있는 권한만이 주어진다. 좋든 싫든 당선된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개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와 새로운 정치환경

돌이켜보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역사상 가장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였다. 비록 무분별한 폭로와 비방, 무책임한 공약으로 얼룩졌지만 올해 대선은 금권과 관권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다. 특히 이번 선거과정에서는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인터넷이 보통사람들의 정치토론장으로 활용됐다는 점이 크게 눈에 띄며, 대선자금을 시민사회단체가 감시했고, 대학 내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됐으며, 진보정당 후보가 TV토론에 등장했다. 그 결과 공정한 선거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는데, 이런 변화 속에는 그보다 큰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인터넷이 정치토론장으로 활용됐다는 것은 정치의 활성화를 뜻한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취약한 당내 기반을 극복하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노사모와 인터넷을 들 수 있다. 확대된 정치토론장으로 말미암아 정치권력은 폭넓은 토대가 필요하고, 그 바탕 위에서만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인터넷도 없이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을까요”라는 어떤 학생의 기습적 질문을 받고 당황한 기억이 난다. 이제 인터넷은 젊은 세대의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자 정치행위 수단이 되었다. 인터넷은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해 다양하고 적극적인 정치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21세기 정치혁명의 매체로 자리잡았다.

2002 대선유권자연대의 선거자금 감시활동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법적 근거가 없는 시민사회단체의 감시활동에 모든 대선후보들이 협력하고 서약했다는 사실은,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증대되는 세계사적 조류를 반영한다. 인터넷과 더불어 NGO가 정치과정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한국정치의 질적 변화를 예견케 한다.

대학 내 부재자 투표소 설치도 놀랄 만한 정치적 사건이다. 오랜 기간 정치권력과 대립축을 형성하면서 투쟁해온 대학생들이 선거 참여운동을 벌이고, 그 결과 대학 내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됐다는 사실은 단순히 대학생의 투표율 제고라는 의미를 넘는 일대사건이다. 이는 권력에 대한 청년층의 적극적 의지표명으로서, 젊은 세대가 앞장서서 한국정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진보정당 후보가 TV토론에 등장한 것이다. 이는 한국정치의 급속한 변화를 시사하는 징표다. TV 합동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자신의 정견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올해는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사형을 당한 지 43년이 되는 해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표를 얻은 조봉암 중심의 진보당이 냉전논리에 따라 괴멸된 이후, 오늘에서야 비로소 진보정당 후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정치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 늦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선거과정에서 보여준 진보정당의 위상강화는 한국정치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폭풍의 서곡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창조적 에너지 활용해야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의 밑바탕에는 냉전체제 붕괴와 민주화라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이 있다. 최근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전국민적 규탄시위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운동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역할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과거에도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어린 여학생의 죽음에 부닥침으로써 특별히 전 국민이 분노하는 까닭은 한국인의 감성지수가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 한국인들이 과거에 미국으로부터 받은 지원을 잊었기 때문도 아니다

이미 대다수 한국민은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더 이상 미군에게 치외법권까지 허용하면서 전쟁 방지의 역할을 애걸할 필요가 없다는 탈냉전시대의 통찰력을 가졌다. 이 때문에 우리의 비판은 미국민이 아니라, 변화된 세계사적 흐름에 역행하면서 구태의연한 대응을 일삼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일 따름이다.

새 대통령은 이와 같은 국내외적 변화과정에 매우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변화에 뒤질 경우 국민의 창조적 에너지를 헛되게 써버리고 말 것이며, 지나치게 앞서갈 경우 사회 구성원 간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야말로 중용의 정치적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