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홍세화ㅣ한겨레 기획위원(한겨레 강창광 기자)
문제는 이렇게 개인을 집단에 종속시키는 집단주의 윤리가 구조적으로 합리적 토론과정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우선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는 반면 집단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 의해 방증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남의 개인’도 ‘나의 개인’만큼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지만, 개인을 사회집단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식이나 관념, 또는 일상에 젖어 있는 집단 구성원들은 집단의 헤게모니에 기대거나 숨은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개인을 포기하고 패거리에 몸을 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집단이기주의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개인주의를 배제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기주의자들을 양산하고 수구성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한겨레> ‘왜냐면’의 토론 제기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교육부 관료들이 보여주듯이, 숨어 있는 이기주의자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회에서 공익을 위한 합리적 토론과정은 배제되고 수구성이 굳어진다. 관련자들은 집단 안에 익명으로 숨어 있을 수 있는 점을 활용한다. 이 익명의 편의성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평가할 뿐 참여하지 않는다. 술집에서나 강의실에서는 한국의 ‘개판 정치’를 열심히 떠들면서 비판하지만 정작 정당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심지어는 투표조차 하지 않기도 한다. 또 익명의 편의성은 구성원들의 창조성은 계발시키지 않고 무능과 불성실을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구성원들에게 긴장감을 늦추게 하고 일상적 타성에 머물게 한다. 고인 물이 썩듯이 사회는 정체되는 한편으로 규율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개인들에 의한 사회 변화 요구와 주장을 집단의 규율로 심판하는 것이다. 사회는 더욱 경직된다. 수구세력은 규율을 떠받든다 한국 사회의 수구 기득권 세력이 국가보안법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듯 어떤 집단에서나 헤게모니 세력은 기존 규율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든다. 사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규율이 사회를 위하는 게 아니라 헤게모니 세력을 위해서라는 점을 국가보안법은 확인해준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인 것과 같다. 진정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바란다면 오늘의 현실과 미래의 전망 사이에서 끝없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한 단계 올라설 때마다 미래의 전망은 달라진다. 따라서 사회 진보를 위하여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규율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주의다. 구성원들의 요구나 주장, 또는 표현에 대한 평가 잣대는 기존 규율이 아니라 공익에 이로운가 아닌가에 있어야 한다는 데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래야만 집단에 숨은 자들의 이기성과 수구성이 합리적 토론과정을 배제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