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과 ‘도풍’
등록 : 2002-12-04 00:00 수정 :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도풍’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도청은 인권침해라는 민감한 성격에다 첨단기술·첩보전의 흥미적 요소까지 있어 파급력이 큽니다.
대선 때마다 되풀이돼온 일입니다. 그런데 불구경하다가 재만 쥐는 일을 피하려면 불길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초점은 세 가지입니다. 도청기록 문건의 진위, 국정원의 도청관행, 정치공작 여부 등이 그것입니다.
문건의 진위는 한나라당과 국정원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국정원 내부자의 제보라고 밝혔습니다.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내부자 제보가 확실하고, 제보자가 증언을 하면 진위는 바로 확인됩니다. 이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국정원장부터 줄줄이 사법처리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권은 간명한 진실규명이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분위기입니다. 진실 접근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치적 공방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면 한나라당은 밝힐 책임이 있습니다.
문건의 진위가 가려지지 않는다고 국정원이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정원은 김영삼 정권 들어 통신비밀보호법을 만들어 국내 정보수집을 규제하고, 김대중 정권 들어서는 이름을 바꾸고 국내 보안 위주의 조직을 해외·국내·대북 등 3개 파트로 재편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치사찰이 이뤄졌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며 몇 차례 꼬리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정보기관은 인적정보와 신호정보에 의존하는데, 소수파 정권인 현 정권은 인적 네트워크에서 밀리자 신호정보에 많이 의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지난 정권 때 도청을 한 한나라당이 도청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현 정권이 해도 심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런 정황은 현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문건이 국정원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국정원은 ‘그러면 도청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청하려고 들면 기술적인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선후보들이 국정원 수술을 공약하고 나선 것은 바람직합니다. 천문학적 예산을 쓰면서 뒷조사를 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회창 후보는 해외정보 수집과 테러방지, 간첩수사 등 두 가지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으며, 노무현 후보는 국내사찰 업무를 중단시키고 해외정보만 수집 분석하는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국정원을 개혁하려면 문제를 밝히고 근원적 수술을 해야 합니다. 정치공세로 불길이 번지면 이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도청이 있었다 해도 소극적인 정보수집을 적극적인 정치공작으로 몰고 가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정치공세입니다.
대선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토론의 장이 돼야 합니다. 도풍에 대선이 빛 바래지 않고, 대선이 도청문제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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