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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종교보다 깊은 신념, 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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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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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물론 우유나 달걀조차 먹지 않는 사람들… 생활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

(사진/채식뷔페의 조리실 모습. 채소만 고집하지 않고 견과류, 콩류 등을 적절히 섭취한다면 채식만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제게 채식은 종교보다 깊은 신념입니다.”

채식주의자 이원복(36)씨는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에게 채식은 단순한 식도락이나 건강을 위한 습관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기아와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생명존중을 실천하는 절박한 운동이다. 그가 11년 전 구입한 재활용 냉장고에는 고기는 물론 우유나 계란조차 단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다. 원료에 계란이 포함된 빵조차 먹지 않는 이원복씨. 그는 “이젠 억지로 우유를 먹여도 못 먹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채식습관은 건강이나 체질 탓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얻은 깨달음이 그 시작이었다. 대학 시절 어느 날 식탁에 오른 고기반찬을 보며 ‘이 고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게 됐을까’를 생각하게 된 이원복씨. 순간 귓가에 소, 돼지,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어 ‘나의 미각을 위해 산 동물을 희생해왔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평소에 생각을 꼭 실천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이씨는 그뒤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의 눈에는 고기가 ‘동물의 시체’로 보였다.

고기가 ‘동물의 시체’로 보이다


“태어나자마자 거세된 채 성장호르몬을 맞으며 사는 송아지, 평생을 움직일 틈없는 우리에 갇혀 지내는 닭, 도살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최후를 맞는 그 수많은 동물들을 생각해 보세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고등학교 사회교사인 이씨의 하루 식생활은 단촐함 그 자체다. 아침은 사과나 바나나 같은 과일로 간단히 때운다. 점심은 손수 준비한 도시락. 현미콩밥에 두부, 콩자반, 감자볶음을 곁들인다. 저녁에는 주로 김치된장찌개를 즐긴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에 말갛게 된장만 풀어 끓인 김치된장찌개. 남들은 심심한 맛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맛있고 행복한 식사다. 가끔 출출할 때면 야채라면을 야식으로 먹는다. 그는 “육식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양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고 자랑했다. “현미콩밥을 기본으로 한다면 어떤 형태의 채식을 해도 영양이 부족하지 않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얼마 전 추석을 생각하면 그는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스민다. 사실 기름진 음식이 위주인 명절은 채식인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때다. 더구나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채식을 힐난할 때면 더욱 그렇다. 이씨가 처음 채식을 시작할 때도 가족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올해 추석 때는 달랐다. 온 가족이 모여 채식음식만으로 명절상을 차린 것이다. 1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채식습관이 드디어 가족들의 인정을 받은 순간이었다. 이씨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고 돌이켰다.

이원복씨가 ‘동물보호’의 차원에서 채식을 시작했다면 ‘푸른생명 한국 채식연합’의 서울대표 이광조(33·학원강사)씨는 10년 전 명상에 몰두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식을 끊게 되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명상을 하던 어느 날 매주 즐기던 삼겹살이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가 났다. 게다가 맛도 달라졌다. 전에는 고소하게 느껴지던 돼지고기 맛이 갑자기 비려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고기는 끊었지만 그뒤로도 멸치와 계란은 계속 먹었다.

어느 채식주의자의 ‘조개사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채식원칙이 가끔 흔들리기도 했다. 회식자리에서 불가피하게 고기를 입에 대기도 했던 것이다. 마치 고기를 먹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다. 그때만 해도 “저는 채식주의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용기가 부족했다. 하지만 5년 전부터는 다시 확고한 채식주의자로 돌아갔다. 90년대 중반에 접하기 시작한 외국 환경·생태학자의 논문을 읽으며 채식에 대한 신념이 점점 굳어졌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함께 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망우동에 사는 이승섭(32)씨 가족이 바로 그런 경우다. 고기를 몹시 좋아하던 이씨가 대학 시절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된 것은 ‘조개사건’ 때문이었다. 자취를 하던 대학 4학년 어느 날, 된장을 끓이려고 조개를 사놓은 이씨는 깜빡 잠이 들었다. 잠결에 부엌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내다봤다. 죽은 줄 알았던 조개들이 깨어나 움직이는 소리였다. 갑자기 생명에 대한 경외가 밀려들었다. 그뒤로 이씨는 육류를 끊었다.

결혼한 뒤 부인 이정수(32)씨에게도 채식을 권했다. 처음엔 좀 망설였지만 부인도 이내 채식인이 됐다. 임신중에도 채식을 했다. 의사는 만류했지만 결국 채식을 고집해 3.2kg의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채식을 한 딸 지혜는 오늘까지 잔병치레 한번 없이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지난해 이승섭씨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채식 대중화에 나섰다. 대만에서 6개월 동안 채식 공부를 하고 돌아와 ‘베지푸드’라는 채식전문 유통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승섭씨는 “채식도 맛있어야 한다”며 “다양하고 맛있는 채식음식을 제공한다면 누구나 채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다. 표고버섯으로 만든 양고기, 콩으로 만든 햄과 소시지, 콩으로 만든 치킨…. 이씨가 직접 만들어 오늘도 그의 가족 식탁에 오를 채식 메뉴들이다.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을 생명존중의 실천으로 여긴다.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되는 동물은 매년 200억 마리.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감정을 느끼는 동물을 죽이는 것은 생명에 대한 범죄라는 얘기다. 다음으로 채식은 기아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소에게 먹이면 한 사람 분의 고기와 우유밖에 얻을 수 없는 콩과 옥수수를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22명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광조씨는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단백질의 90%를 낭비하는 행위이며 이런 불합리한 행위는 이윤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의 횡포”라고 목청을 높였다.

생명경시 풍조가 없어지는 세상을 위하여

(사진/온 가족이 함께 채식을 하는 이승섭씨 가족(왼쪽). 이승섭씨는 “채식도 맛있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 ‘베지푸드’라는 채식전문 유통회사를 설립했다)
채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채식은 또한 환경파괴를 막는 일이다. 동물 사육을 위해 벌채되는 숲은 매년 남한만한 크기이며, 벌채 된 숲은 곧 사막화된다. 게다가 사육되는 가축의 배설물은 수질오염의 주원인이다. 무엇보다 채식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채식의 미덕은 ‘생명존중 사회의 건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매일 행해지는 죽음의 의식(육식)에 너무 익숙해져 생명경시를 무의식적으로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채식으로 전환하면 낙태와 같은 생명경시 풍조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채식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몇몇 외국에는 즐비한 채식식당들을 찾기 어렵다. ‘푸른생명 한국 채식연합’ 회원들은 “가까운 대만만 해도 인구의 30%가 채식인”이라며 “길가 어디에서나 채식식당을 볼 수 있고, 군대와 학교에도 채식 배식구가 따로 있을 정도”라며 부러워한다.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시킬 때도 일일이 “멸치 빼고요”라고 외쳐야 한다. 집 밖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기껏해야 ‘고기 빼고, 달걀 뺀’ 비빔밥이 고작이다. 이마저도 귀찮아 과일을 사먹는 것으로 때우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채식인들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도 큰 부담이다. 아직도 채식인들 심심찮게 “그래서 사회생활 어떻게 할래?”라는 타박을 듣기 일쑤이다. 심지어 적대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광조씨도 몇해 전 그런 경험을 했다. 평소에는 잘해주던 동료강사 한명이 술만 먹으면 “넌 왜 채식하냐? 그렇게 해서 사회생활하겠느냐”며 힐난해 난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런 인식 탓에 웬만한 신념을 갖지 않고는 “난 채식인입니다”라고 밝히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저 회사 회식이나 친구들 모임에 묵묵히 따라가 고기를 열심히 굽는 게 이들의 일이다. 하지만 이원복씨는 “스스로 채식인임을 밝히고 왜 채식을 하는지, 채식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해야만 채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뿐 아니라 스스로 채식습관을 지켜갈 수 있다는 조언이다.

이처럼 채식을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철학의 차원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은 98년부터. 98년 11월 문을 연 하이텔 채식동호회가 그 모태가 됐다. 이어 99년 8월 천리안에 채식동호회가 생겼고 올 들어 인터넷 채식동호회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불과 2년 만에 하이텔 동호회에 350명, 천리안에 150명, 인터넷 사이트 ‘생명과 환경을 살리는 채식모임’ 회원이 200명에 이를 만큼 급속하게 성장했다.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하고 있지만 30대가 주연령층이다. 30대는 아직 비교적 건강한 나이. 이는 채식주의자들의 식사원칙이 건강에 대한 염려보다 철학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규모뿐 아니라 채식에 대한 철학도 깊어졌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생각을 나눔으로써 채식에 대한 좀더 확고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모인 채식주의자들은 지난해 12월 ‘푸른생명 한국 채식연합 발기준비모임’을 발족했고, 올 7월에는 ‘푸른생명 한국 채식연합 사이트’(www.vegetus.or.kr)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채식만으로 건강 유지할 수 있다

(사진/10년전 명상에 몰두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식을 끊은 이광조씨. 채식뷔페에서 식단을 고르고 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채식인구가 확산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 요식업 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학생 가운데 20∼30%가 채식을 즐긴다고 응답했다. 특히 여대생의 채식비율은 40%에 육박한다. 미국 전체적으로 생선을 먹지 않는 사람은 480만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우유, 달걀 등 일체의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철저한 채식주의자 ‘비건’(vegan)은 171만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계적으로는 약 2∼3%의 사람들이 채식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식이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물성 단백질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동물성 단백질과 식물성 단백질은 1 대 1로 섭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영양학의 고전적 정의는 채식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화가 일고 있다. 미국영양학회는 의회가 채택해 내년까지 유효한 ‘채식에 관한 기본견해’ 보고서에서 “적절히 계획된 채식은 건강에 좋고 영양학적으로 적절하며 특정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인정했다. 이 밖에도 채소만 고집하지 않고 견과류, 콩류 등을 적절히 섭취한다면 채식만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10월1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푸른생명 한국 채식연합’이 주최하는 세계채식인의 날 행사가 열렸다. 한국에서 처음이다. 이날 채식주의자들은 생명존중, 환경보호, 건강증진 등을 내용으로 한 채식헌장을 발표하고, 생명존중을 형상화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행사장 주변에서는 무료 채식 시식회도 곁들여졌다. 이 행사는 채식이 소수의 별난 행동이라는 인식 수준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로 확산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채식을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로 여기는 채식주의자들. 그들의 삶이 바로 우리 곁에 와 있다.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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