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성으로 똘똘 뭉친 한국 최초의 챔피언 이인영… 여성 프로복싱의 대중화 신호탄을 쏘다
실내 조명이 꺼지자 영화 <록키> 주제가가 “빠밤 빠~, 빠밤 빠~” 하며 JBL스피커를 타고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음악이 줄어드는 틈을 타 나비넥타이를 맨 장내 아나운서가 “홍코너~ 산본체육관 소속 이~인~영~” 하고 소리쳤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선머슴’ 같은 작은 체구의 여자 권투선수 하나가 후드 달린 긴 옷을 뒤집어쓴 채 링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는 글러브 낀 손을 관중들에게 치켜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눈요기? 천만의 말씀!
지난 11월16일, 서울 이태원 캐피탈호텔 특설링에 마련된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복싱 플라이급(50.8kg) 챔피언결정전(8라운드)에 앞서 이인영(30·산본체육관) 선수가 소개되는 장면이다. 이인영이 맞서 싸울 선수는 서울 영등포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국내 유일의 여고생 프로권투선수 김주희(17·거인체육관).
여자 권투라 흔히 여자 프로레슬링처럼 ‘눈요기’()거나 ‘장난’이겠거니 하는 생각은 1회전을 알리는 공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공이 울리자마자 관중들은 두 패로 나뉘어 ‘라이트!’, ‘레프트!’ 하며 두 선수의 싸움을 부추겼다. 관중들의 주문에 화답이라도 하듯 ‘미녀복서’ 김주희가 먼저 숨고를 틈도 없이 빠른 몸동작을 앞세워 원투스트레이트 연타 공격을 해댔고, 경기를 느긋하게 풀어가려던 이인영은 당황한 빛을 역력히 보이며 특유의 라이트훅과 몸통 공격으로 맞섰다. 경기 초반 탐색전은 없었다. 결국 이인영의 ‘돌주먹’을 무시한 채 무모하게 몸을 섞어댄 김주희가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4라운드 초반 이인영의 회심의 라이트훅을 얼굴에 맞더니 그대로 앞으로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늦깎이’ 이인영이 1912년 우리나라에 권투가 소개된 뒤 처음으로 여성 프로 챔피언으로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72년생인 이인영이 권투에 입문한 것은 불과 1년3개월 전. 그는 하루에 7t씩의 짐을 나르는 트럭운전을 7년 동안이나 하면서 남자도 혼자 들기 힘든 50kg이 넘는 콩가마를 들어올리며 일찌감치 펀치력을 키워왔다.
광주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4년간 장거리 육상선수로 지낸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자애들과 항상 싸우며 ‘깡패’란 별명이 붙어다니기도 한 그는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통해 우연히 프로권투 김득구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권투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도 언젠가는 권투선수로 링에 서야지” 하는 보통 여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희망을 품게 됐다. 가정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하는 아버지 때문에 가사의 모든 책임을 도맡아온 어머니 김삼순(66)씨의 강한 생활력은 권투선수로서 그의 근성을 키우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
권투선수 꿈을 간직한 그는 전 한국 플라이급 챔피언 출신 김주병(51) 산본체육관장을 만나면서 늦은 나이에 비로소 선수로서의 꿈을 실현하게 됐다. 25년째 권투체육관만을 운영해온 김 관장은 “이인영 선수의 경우 일찍 시작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 마치 권투를 위해 태어난 선수 같다. 남자 선수와 스파링을 할 때도 제대로 맞춰 다운시키는 경우가 빈번할 정도로 펀치력이 대단하다”고 이인영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김 관장은 “체육관에 웬 선머슴 같은 처녀가 들어왔을 때 시간이 남아돌아 취미생활로 권투를 하겠거니 하며 신경도 안 썼는데, 타고난 소질과 근성을 지니고 프로선수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턱없이 적은 보상… 대전료는 150만원뿐
지난 7월 프로에 데뷔한 이인영의 프로 통산 전적은 4전 전승(2케이오). 상대를 여러 차례 다운시키고도 요령이 부족한 탓에 아쉽게 두번의 판정승을 남겼다. 이에 대해 김 관장은 “펀치력이 있는데도 링에만 오르면 아직 자신의 힘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훈련과 시합을 거듭할수록 나아질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다.
이인영은 매일 아침 체육관 근처 수리산을 찾아 8km 이상씩 뛰고 난 뒤 오후 3시부터 체육관 훈련을 한다. 집에서도 권투비디오를 구해 보면서 하루라도 훈련과 시합을 빼먹지 않는다. 권투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프로선수로서 후천적인 노력도 겸비한 셈이다.
평상시 체중이 52kg(신장 159cm)밖에 되지 않아 플라이급 한계 체중인 50.8kg을 맞추는 것은 그에게 땅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다. 이번 결정전을 하루 앞두고 시행한 계체량 심사에서도 1kg이나 밑돌 정도로 자기 관리 측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러한 자기 관리가 철저한 데는 세계 정복이라는 야심이 웅크리고 있다. 한국 초대 챔피언에 오른 뒤 그는 “한국 챔피언은 세계무대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미국의 킴 메서(한국계 입양아·지난 4월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자진반납)처럼 세계챔피언까지 되고 싶다”며 한번 시작한 것에 대해 끝장을 보고 싶어했다.
전 세계챔피언 출신인 변정일 BJI프로모션 대표와 지난 9월 프로모션 계약을 맺은 그는 내년 1월 중 세계 8위 유미 다카노(9승5패·1케이오)를 국내로 불러들여 싸운 뒤, 7월에 플라이급이나 한 체급 아래인 주니어플라이급 세계 도전에 나선다는 계획을 잡고 있다. 이인영을 통해 여성 권투의 프로화와 대중화를 동시에 모색하는 변정일 프로모터는 “일단 플라이급에서 챔피언이 나왔지만 체급이 다양해지면 일본과의 교류 등을 통해 여성 프로권투 시장을 넓혀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플라이급을 포함해 협회에 등록된 여성 권투선수는 현재 30명에 불과하다. 이인영이 이번 시합을 끝내고 공식적으로 손에 쥐게 되는 파이트머니(대전료)는 150만원. 초대 챔피언이라는 명예를 받은 것에 비해 금전적 보상은 훈련비에도 못 미칠 정도로 턱없이 적다. 그가 직업선수로서 헤쳐나가야 할 주변 환경은 앞으로 링에서 벌일 처절한 싸움만큼이나 거칠고 험난한 편이다.
글 박원식 기자/ 한겨레 스포츠레저부 pwseek@hani.co.kr·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사진/ 김주희를 4회 KO로 눕히고 챔피언에 오른 이인영. 권투 입문 1년3개월 만에 큰일을 해냈다.

사진/ 김주희에게 라이트훅을 날리는 이인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