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정보통신의 결합, 그 가장 한가운데 서 있는 노동정보화사업단 이용근씨
정말 큰일날 뻔했다. 어렵사리 인터뷰를 약속한 이용근(39)씨가 갑자기 할아버지 상(喪)을 당해 고향으로 훌쩍 내려가버렸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할아버지 빈소를 지킨 뒤, 살인적이라는 주말 고속도로의 ‘교통지옥’을 뚫고 7시간이 넘는 운전을 한 끝에 서울에 도착한 이용근씨를 토요일 밤 10시쯤 ‘노동정보화사업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원고 마감시간이 이미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사진을 찍으면서 이용근씨는 “오늘은 정말 흉한 몰골이어서 안 되는데…”라고 걱정을 했다.
92년, 공간이동의 충격
애초 나는 ‘진보네트워크’에서 열심히 일하는 장여경씨와 민주노총의 정보통신부장 최세진씨 둘 중 한 사람을 이번 인터뷰 대상자로 일찌감치 점찍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한목소리로 “나말고 이용근씨를 만나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하는 일도 별로 없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편이지만, 이용근씨는 자신의 분야에서 정말 소문나지 않게 묵묵히 오랫동안 중요한 일을 해온 정보통신 분야의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대학을 2학년까지만 다니고 아무 미련도 없이 부천의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뒤, 노동조합 파업, 구속, 해고, 민중회의, 백기완대통령선거대책본부 등의 활동을 두루 거친 이용근씨에게 정보통신의 지평이 열린 것은 세계사 격동의 시기인 1992년 어느 날이었다. “문서 하나를 지방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급히 받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었어요. 지방의 그 활동가가 ‘일대일 통신’이라는 방식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컴퓨터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한 다음 ‘이야기’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나하나 따라했는데, 어느 순간 그 문서의 내용이 컴퓨터 화면에 쫙 올라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공간이동’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요.” 이용근씨는 그 뒤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등의 진보적 통신 동호회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바통모’, ‘현철동’, ‘노동연구포럼’….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우리나라 정보통신 역사의 한 시대를 이끈 모임들이다. 1994년에는 나우누리 ‘노동연구포럼’의 시솝(sysop)을 맡았고 나와 처음 만난 것은 그 무렵이다. 얼마 전까지 이용근씨는 노동정보화사업단의 대표였다. 그런데 노동정보화사업단이 ‘대표’를 포함한 모든 직책을 없애버렸다. 모든 일꾼들은 평등하게 ‘활동가’일 뿐이다. 사무국장과 회계 담당자를 3개월씩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지만 별로 역할이 없어서 요즘은 누가 사무국장이고 회계 담당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이 단체는 평등의 이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부터가 뭔가 범상치 않다. 국민의 가슴을 떨게 한 동영상의 위력
노동정보화사업단은 한마디로 “노동운동의 정보화와 관계된 전문적 사업을 하는 단체”다. “1996년 초창기에는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동자들에게 정보화에 대한 시야를 틔우는 교육사업을 많이 했어요. 정보기술(IT)이라는 것이 도대체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사회의 진보적 발전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노동운동과 노동자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에서는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내용들을 다뤘지요.”
2년쯤 전부터 주력하고 있는 사업은 인터넷을 둘러싼 노동정보에 관한 것들이다. 민주노총과 산하 각 연맹을 비롯해 웬만한 노동조합의 홈페이지는 대부분 노동정보화사업단의 손길을 거쳤다. 투쟁시기에는 그에 따른 발빠른 대응으로 ‘이슈 홈페이지’를 제작한다.
노동운동의 굵직한 투쟁과 결합하는 각 단체의 공조 활동은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라는 조직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용근씨는 18개 단체가 조직한 그 협의회의 운영위원장 역할을 맡고 있다. 대우자동차 투쟁, 발전노조 파업 등과 같은 사건뿐만 아니라 인터넷 검열, 노동자 감시체제를 폭로하고 막아내는 일 등 중요한 투쟁이 있을 때마다 이용근씨가 있는 노동정보화사업단 사무실은 인터넷 상황실이 되고 이용근씨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당연하다는 듯 사무실에서 거의 매일 밤을 새운다.
대우자동차 대량 정리해고 사건 때는 활동가들이 ‘대우차노조 총파업 영상중계단’을 만들어 연일 계속되는 거리시위를 인터넷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중계했다. 3개월 동안 29개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랐는데, 그 중 24호가 온 국민의 가슴을 떨게 한 경찰의 야만적 폭력 장면 동영상이다.
지난 봄 발전노조 파업 때, 합법적 파업이 봉쇄된 5300여명 조합원들이 400여개 소모임으로 나뉘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파업을 이어간 사상 초유의 ‘산개투쟁’이 가능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노동네트워크협의회의 활동에 힘입은 바 컸다. 노동네트워크에서 발전노조에 인터넷이라는 무기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고, 정보통신 활동가들이 매달려 하룻밤 만에 발전노조투쟁특별홈페이지(http://baljeon.nodong.net)를 만들어냈다.
게시판의 위력은 대단했다. ‘다른 조합원들은 대부분 벌써 업무에 복귀했는데 우리들만 지방도시를 전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던 조합원들의 갈증이 한꺼번에 게시판에 쏟아져나왔다. 서로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조합원들은 인터넷에 들어가 지도부의 지침을 전달받고, 조별 상태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통해 보고했다. 게시판에는 하루에만 2천∼3천개의 글들이 올라왔다. 가족들이 올린 글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이 “힘내서 꼭 이기라”는 글들을 열심히 올렸다. 아내들이 조합원들을 대신해 거리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며 조합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전국에서 투쟁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노동자들의 글이 쏟아져들어왔고, 노동자들 사이에는 발전노조 조합원들을 자기 집에서 재워주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해외에서 전해지는 연대 메시지들도 큰 힘이 되었다. 조합원들은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발전노조 영웅담의 원천
영상 활동가들은 ‘민영화저지미디어활동단’을 조직했고, 일반 방송에서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국민에게 전하는 유력한 대안 매체로서 인터넷을 활용했다. 발전노조 위원장은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매일 조합원들에게 전하는 영상 메시지를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발전노조 파업 38일 동안 100개가 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려졌고 매일 수만명이 이 동영상을 봤다.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이 한국 노동자들에게 신화와 같은 영웅담으로 가슴 깊게 남게 된 것은 이용근씨와 같은 정보통신 활동가들의 쉼 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정보화사업단은 그런 투쟁 활동을 무료로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대목에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다.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 먹고사나” 이용근씨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래도 한달에 60만원씩 받습니다. 98년 20만원부터 시작해서 매년 정확하게 10만원씩 올랐어요.”
부천에서 ‘해고노동자회’ 의장을 지낼 무렵 사무실을 같이 사용하던 ‘부천노동문제연구소’의 간사 정현주(39)씨를 만나 1993년에 결혼했다. “첫애 나을 무렵이 가장 어려웠어요. 우유 떨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쌀이 떨어질 때는 느낌이 또 달랐어요. 저금통의 동전 한닢까지 남지 않았을 때는 정말 위기감이 느껴지더군요. 처가 참 고생 많이 했어요. 애 낳고 6개월 만에 일을 시작했지요. 그때 6개월 된 아이를 맡아주는 보육시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겁니다.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아온 처가 지금도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그게 마음에 제일 걸려요.” 목이 잠긴 듯 이용근씨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고민을 같이 많이 했어요. 처랑 같이 ‘잠시 활동을 쉬고 일시적으로라도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얘기도 했지만, 활동을 잠시 중지하면 그것이 곧 영원히 중지하는 것이 되고 마는 예를 주변에서 많이 봐서 조금 더 견뎌보자고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용근씨는 “매스미디어는 보수언론”이라고 단정지었다. 대중매체들을 자본가 집단이 소유하고 운용하기 때문에 소외된 층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고 가진 자들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부탁했다.
“인터넷의 쌍방향 통신이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한 발짝 진보시킬 수 있는 중요한 매체라고 얘기하잖아요.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올릴 수 있고 여론 형성의 주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노동자들도 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때입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이용근씨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분야에서 정말 소문나지 않게 묵묵히 오랫동안 중요한 일을 해온 정보통신 분야의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한다.
대학을 2학년까지만 다니고 아무 미련도 없이 부천의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뒤, 노동조합 파업, 구속, 해고, 민중회의, 백기완대통령선거대책본부 등의 활동을 두루 거친 이용근씨에게 정보통신의 지평이 열린 것은 세계사 격동의 시기인 1992년 어느 날이었다. “문서 하나를 지방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급히 받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었어요. 지방의 그 활동가가 ‘일대일 통신’이라는 방식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컴퓨터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한 다음 ‘이야기’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나하나 따라했는데, 어느 순간 그 문서의 내용이 컴퓨터 화면에 쫙 올라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공간이동’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요.” 이용근씨는 그 뒤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등의 진보적 통신 동호회 활동에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바통모’, ‘현철동’, ‘노동연구포럼’….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우리나라 정보통신 역사의 한 시대를 이끈 모임들이다. 1994년에는 나우누리 ‘노동연구포럼’의 시솝(sysop)을 맡았고 나와 처음 만난 것은 그 무렵이다. 얼마 전까지 이용근씨는 노동정보화사업단의 대표였다. 그런데 노동정보화사업단이 ‘대표’를 포함한 모든 직책을 없애버렸다. 모든 일꾼들은 평등하게 ‘활동가’일 뿐이다. 사무국장과 회계 담당자를 3개월씩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지만 별로 역할이 없어서 요즘은 누가 사무국장이고 회계 담당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이 단체는 평등의 이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부터가 뭔가 범상치 않다. 국민의 가슴을 떨게 한 동영상의 위력

사진/ 지난해 6월 정보통신부 앞에서의 1인시위. 이용근씨는 "노동자들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