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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단일화와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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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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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 후보단일화 과정에는 정책의 공론화가 빠졌다. 지금부터라도 재벌청산의 시대적 과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공통분모를 찾아갈 것인지 국민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사진/ 김대영ㅣ민주사회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박승화 기자)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다. 청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재벌을 청산하자는 말은 대기업을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문어발식으로 몸집을 키운 독점의 폐해를 청산함으로써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를 살리자는 뜻이다.

지난주에 성사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간 후보단일화 합의를 바라보면서 새삼 재벌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로 단일화되는지에 따라 21세기의 첫 번째 대통령이 ‘서민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재벌대통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벌은 개혁이 아닌 청산의 대상


후보단일화와 별개로 재벌문제는 이번 대통령선거에게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될 필요가 있다. 정경유착의 한쪽 당사자인 정치군인이 청산된 상태에서 나머지 당사자인 재벌이 청산될 때 비로소 한국 사회가 과거의 유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재벌 때문에 한국 경제의 발전이 늦어지고,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경제위기를 맞았으며, 한국 사회의 총체적 개혁이 지체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재벌은 기업의 경쟁적 발전과 경영자의 창조적 능력을 가로막는다. 2세에 이어 3세까지 이어지는 재벌의 위세 속에서 많은 경영자들이 창의적인 경쟁을 포기한 채 그 하청체계 속에 안주하려고만 한다. 또 재벌공화국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은 공상으로 전락하고,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재벌의 천국에 들기 위한 피나는 각축이 벌어진다.

이런 재벌청산론에 대해 혹자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서구에서 자유민주주의자들이 강력한 ‘독점금지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눈감은 채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전형적 자유민주주의자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독점금지법을 강화하면서 외친 연설을 들려주고 싶다.

“약자를 짓누르는 강자를 방지하기 위한 법률이 없다면, 산업은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재벌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은 김대중 정부는 재벌을 정당화시켰을 따름이다. 이것은 지난 9월에 대한생명을 인수한 한화그룹이 축제 분위기와 선망의 눈길 속에서 국내 5대재벌이 됐을 때를 기억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막강한 힘이 있는 재벌을 방치한 채 공정한 경쟁을 추구한다는 것은 헛된 말일 뿐이다. 재벌은 부의 독점을 바탕으로 정치까지 조종한다. 1988년의 5공비리 청문회장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정주영씨에게 국회의원들이 굽실거린 것처럼, 부의 독점은 필연적으로 정경유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은 재벌을 방치한 채 추진됐기 때문에 실효성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재벌이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정책은, 주5일 근무제의 사례에서 보듯 표류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는 재벌의 대변자를 국정의 동반자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김대중 정부는 과거 박정희 시대에 차관을 배분하고 정치자금을 모금하는 등 정경유착의 부패고리로 작동한 전경련과 더불어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개혁정책의 표류와 빈부격차의 심화로 귀결됐다.

민주주의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각 후보는 재벌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밝혔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실효성 없는 재벌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말했고,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는 현 정부의 재벌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으며,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재벌개혁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론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회창 후보에게 재벌청산을 기대하기는 어렵겠고, 재벌청산의 가능성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후보와 권영길 후보에게 기대할 수 있겠다. 그러나 노-정 후보단일화로 말미암아 재벌을 비호하는 이회창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낮아졌음에도 재벌청산의 전망은 더 불투명해졌다. 왜냐하면 후보단일화의 파급으로 권영길 후보의 당선이 더 어려워졌고, 노-정 단일후보의 경우 재벌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현실정치를 책임지는 정당이 자신의 정책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다른 정당과 더불어 정책연합을 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국민이 바라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연합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책연합 과정은 공론화의 과정과 맞물려야만 한다.

노-정 후보단일화 과정에는 정책의 공론화가 빠졌다. 지금부터라도 재벌청산의 시대적 과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공통분모를 찾아갈 것인지 국민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재벌청산을 위해 재벌 2세와 정책연합을 할 수도 있지만, 공론화의 과정을 생략한다면 정당한 정책연합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후보단일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문제라는 말이다. 민주정치에서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의 정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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